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영주 Aug 29. 2020

비가 내린 후, 웅덩이

비가 내린 다음 날, 고인 물과 보는 물

집에서만 보내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지만 가끔 산책은 나간다. 

요즘엔 날씨를 좀처럼 종잡을 수 없기에 비가 그치고 해가 들면 곧바로 가볍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집 근처 산책로로 간다. 마스크를 낀 채 오래 걷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지만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이렇게 나와서 하늘과 산을 보면서 걸을 수 있다는 데 감사한다. 


모든 것이 이보다 안 좋아질까, 싶던 순간에도 더 안 좋아질 때가 있었던 걸 생각하면 지금이 최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의외로 그 모든 순간이 전복되어 정말 좋아질 때도 있다. 희망이란 건 그런 걸 겪어본 사람들이 품는 꿈이라고 종종 생각한다.


어제도 비가 내린 후였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숲길로 걷다 보니 비가 내린 후 물이 고인 웅덩이가 보였다. 

웅덩이는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이라 피해 가는 방법도 달랐다. 작은 웅덩이 몇 개는 가볍게 뛰어 넘어갔지만, 좀 더 걷다 보니 앞의 것들에 비해 엄청나게 큰 웅덩이가 나타났다. 마치 작은 호수처럼 하늘이 비치고, 나무가 비치고, 내 모습도 살짝 비쳤다. 


예전에 읽은 그림책 <비가 그치면..., 도노우치 마오作>이 문득 생각났다. 책 속에서 비가 내린 후 생긴 물 웅덩이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책 속에서는 물 웅덩이도 비추는 존재가 아니라 보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 물 웅덩이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적이었다. 비가 그치면 말라 버리는 것이 물의 숙명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물 웅덩이는 자신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최대한 볼 수 있는 것들을 보려고 애썼다. 그에게는 보는 것이 존재의 이유였던 것이다. 고여있는 것이 아니라.


최근 주변에 우울한 사람들이 늘었다.  나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물 웅덩이를 보며 집에서만 보내던 시간을 떠올렸다. 갇혀있다고 생각할 때 우울은 찾아왔다. 이럴 때일수록 보려고 해야지. 볼 것을 찾아야지.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책 속의 물 웅덩이는 자신 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다 보기로 했다. 지금 현재 내 앞에 존재하는 것을. 시간이 흐르고 나면 다시는 보지 못할 것들을 말이다. 이럴 때 남의 피드나 들여다보는 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인 것 같아 핸드폰을 잠시 내려두었다. 


오늘은 우리 집 고양이가 밥 먹고 자는 걸 지켜봐야지. 알아서 커가는 화초들도 보고 책장에 고이 모셔둔 책도 꺼내봐야지. 쓰다 만 내 글도 마저 써야지. 냉장고를 열어 먹을 만한 걸 찾아봐야지. 

고여 있어도 볼 수 있다면 살아갈 가치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또 희망을 가져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처음 만난 물, 양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