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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Jun 18. 2020

급식이 아니어도 좋아

'급식' 말고 '집밥'


나는 급식 세대다. 그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내 곁에 있을 줄 알았던 엄마가 너무나도 일찍 우리의 곁을 떠나고 난 후, 나는 '남들과 조금 다른 아이'가 되었고 그런 나에게 '급식'이라는 제도는 나를 ‘다를 것 없는 아이’로 만들어주어 참 다행이었다. 집에서는 남들과 다르게 먹었다 할지라도 학교에서는 남들과 같은 밥을 먹는다는 것이 나에겐 쓸데없이 큰 위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 부엌은 항상 썰렁했고 마트에서 사 오는 매일 똑같은 반찬이나 찌개가 늘 냉장고를 채워나갔다. 엄마의 부재가 여실히 드러나는 곳은 그 어떤 곳도 아닌, 우리 집 식탁 위라는 게 참으로 서러웠다.


그런 나에게 청천벽력 같은 순간이 찾아왔다. 중학교 시절, 급식업체가 파업을 하여 당분간 도시락을 싸오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빈손으로 올 일은 없겠지만 매일 똑같은 반찬에, 누가 봐도 인스턴트식품만 끼워져 있을 내 도시락 사정이 눈에 훤했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선 매일 컵라면 사 먹는 게 낫겠다 싶었다.



아빠, 내일부터 도시락 싸오래.. 맛있는 걸로 싸줘.. 똑같은 거 말고.


적잖이 당황한 아빠의 모습은 예상했던바 그대로라, 손톱만큼 남아있던 기대마저도 사라지게 만들었다. 내가 기댈 곳이라고는 급식업체의 파업이 하루빨리 끝나가기를 바랄 뿐, 그 이상을 바라긴 힘들겠다 싶었다.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날은 밝아왔고 아침부터 괜스레 가슴이 콩닥거렸다. 점심시간이 다가올수록 그 긴장감은 더해졌고 끝내 참지 못하고 쉬는 시간에 도시락을 살짝 열어보았다. 보온도 안되는데 굳이 보온도시락에 담아놓은 흰 밥과 내가 좋아하는 대기업 만두랑 떡갈비, 그리고 아빠의 계란말이가 있었다. 아빠가 직접 요리를 해준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비주얼을 기대하긴 어려운 음식들이 주를 이루었던지라 계란말이를 선택했다는 사실에 살짝은 놀라웠다.


아빠의 과감한 선택만큼이나 그 비주얼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계란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색 하나만을 고집했고 살짝 그을린 자국이 계란의 속내를 쉐딩 하여 날렵한 비주얼을 만들어냈다. 그 흔한 야채 토핑 조차도 들어가지 않은 것이 입 안에 넣자마자 서로 녹아버리겠다고 난리를 쳤더랬다. 일단 '계란말이'의 '계란'은 본질을 잊지 않았음에 확실하고 그렇다면 '말이'는 어땠을까.. 말릴 듯 말듯한 모양새가 젓가락이 닿자마자 이내 속을 다 내보이고 말았고, 그냥 '계란부침'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그 날 이후로도 기성품의 반찬은 주기를 지켜가며 나의 도시락을 채워줬고 아빠의 계란말이는 항상 터줏대감의 자세로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아빠는 나의 요구를 적당히 50%만 받아들였다. '맛있는 건' 성공했고 '매일 다른 반찬'은 실패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평범한 그 도시락이 나에게는 '완벽한 특별함'이었다. 다름을 외면하고 싶었지만 다름이 만들어낸 특별함은 우리 가족을 분명 행복하게 했다.


한국사회에서의 ‘집밥’은 걸쭉한 김치찌개의 잔향으로 남는 꼬릿 내와 따뜻하게 잘 데워진 방바닥 같은 느낌이지만 나에게 ‘집밥’은 영 건조했고, 차가운 냉동실의 얼음 냄새랄까.. 무겁게 가라앉지 않고 허공에 떠다닐듯한 느낌. 공허했다. 하지만 아빠는 그 공허함을 채워나가기 위해 부엌을 자주 서성거렸다. 여전히 서툴지만 어쩌다 한 번씩은 100년 전통 원조 맛집의 구수함을 담아내기도 하여 놀라움을 자아내는 아빠의 '집밥'이 나에겐 최고로 자랑할 맛이다. 그리고 그 맛을 꼭 전해주고픈 사람이 있다.


엄마는 아마 이 맛을 모르겠지만 내가 많~이 먹고 엄마 만나면 꼭 말해줄게.


엄마, 아빠 계란말이 진짜 맛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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