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MARANTH Dec 17. 2020

공직생활은 장기전

수험생활이 장기전이었던 것처럼 공직생활도 장기전이다.

내가 원했던 것은 얻지 못했던 한 해. 그러나 내가 가진 것들에 감사한 한 해였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영국과 한국을 오가며 인생의 새로운 시작준비하기에 바빴을 텐데. 코로나 덕분에 두발이 꽁꽁 묶이게 되면서, 오롯이 나의 일상과 직업에 대해 뒤돌아 볼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동기들과는 드디어 이곳에서 10년을 버텼다며 자축했고, 스스로도 대견했다. 


여름 내내 이어진 폭우와 태풍 비상근무 그리고 여전히 진행 중인 코로나와의 싸움이지만 그 속에서도 동료들과 건강하게 보낼 수 있는 하루들에 더없이 소중함을 느낀다. 연차가 쌓여서인지 아니면 나이가 드는 것인지,  스물셋에 첫 발을 디딘 이 조직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도 많이 달라졌다. 이제야 나의 생각을 담을 수 있게 된 일이 재미있고, 꼰대로만 보이던 상사들의 혜안에 감탄하며 아직 배울 것이 많다고 느낀다. 


그래서인지 요즘 브런치에 부쩍 자주 보이는 글 쓰는 공무원들의 이야기가 남 이야기가 같지 않다. 대부분의 글들이 9급~8급 공무원들이 토로하는 조직 생활의 답답함, 업무에서 오는 회의감 혹은 그쯤에 공무원을 그만두고 나간 이들의 이야기인데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브런치에 이 매거진을 연재하면서부터 "서무"와 "9급"을 키워드로 유입이 늘었는데, 비슷한 고민을 가진 이들이 많다는 것이리라. 나 역시도 그랬다. 입사 3년~5년 차 사이에 그들과 같은 고민을 했고, 슬럼프에 빠졌고, 매일 같이 앞으로의 삶에 대해 걱정했었다. 

 

무엇이 문제일까? 그 어려운 공무원 시험 경쟁률을 뚫고 안정적인 직장을 꿰찼음에도 무엇 때문에 우린 결국 조직을 떠나는 결심까지 하게 되는 걸까?


가장 큰 이유는 한창 젊고 공무원에 대한 자부심도 있고, 일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시기에 그 기대치에 걸맞은 일을 할 수 없는 조직 구조의 특성 때문이다. 관료제는 분명 거대한 공무원 조직이 효율적으로 돌아가기 위한 가장 최적의 구조임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일과 직장이 자아실현의 수단까지는 아니어도, 자신의 시간을 의미 있게 쓰고 싶은 요즘 세대의 욕구에는 부합하지 못한다. 일을 통해 배우고 성장하는 시간이 중요한 우리들에게 단순 반복적인 업무는 조금 견디기 힘든 현실이다. 


운이 좋아 단위 업무를 맡는다고 한들 예산을 보는 것도, 보고서를 만드는 것도 서툴고, 방대한 조직의 기능을 이해하는 것도 어렵고, 법령을 몰라서 일이 어렵다. 말 그대로 일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헤맨다. 그런데 누구 하나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은 없다. 인수인계는 하루가 끝이고, 상사들의 기대치는 높고, 민원인들은 그 자리에 맞는 역할을 당장 요구하니 미칠 노릇이다. 그런 상황에서 하급자라서 도맡아야 하는 허드렛일, 제대로 낼 수 없는 목소리, 열심히 해도 성과 인정이 힘든 조직 구조까지. 그냥 속으로 삭히다가 병이 나는 거다. 사표를 낼 수 없어 버티기를 선택하고 7급쯤 되면 본격적으로 기대치에 부합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시기가 온다. ((문제는 그때는 나이(연차)+게으름+꼰대력이 추가되어 일에 대한 의지가 예전만큼 못하다는 것이지만.))

공무원이 되기 위해 치렀던 수험생활이 장기전이었던 것처럼 공직생활도 장기전이다. 정년이 보장되는 긴 시간만큼 어느 정도 위치에 오르기까지 말단으로서 인내해야 하는 시간도 길다. 젊을 때 타오르던 일에 대한 열정이 꺼져갈 쯤에야 제대로 해 볼 만한 일을 준다. 그때까지 스스로 버텨낼 수 있는, 스스로를 지탱할 원동력 그 무언가가 필요하다. 


꼭 자기 계발이 아니어도 된다. 이 시간을 감내하고 조직에서 승승장구하겠다는 목표이든, 운동이든, 직장 내에서 인간관계의 확장이든, 아니면 매달 나오는 월급에 만족한다는 것이든, 그것이 있어야 길고 긴 공직 생활을 버틸 수가 있다. 조직은 그것을 대신 찾아주지 않지만 조직 안에서 찾을 수는 있다. 


동기들 중 일부는 변화를 위해 상부 기관으로 전입 시험을 쳐서 떠났다. 일부는 결혼해서 안정적인 직장에 만족하며 산다. 나의 경우에는 대학교 때 포기했던 유학을 가겠다는 목표 하나로 버텼다. 그 덕에 책도 쓰게 되었고, 그때 공부한 것들은 10년 차에 접어들면서 만난 업무에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공무원 시험 합격을 위해 장기 전략을 세웠던 것처럼 공직 생활에서도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하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면, 혹은 이제 공직에서의 첫발을 내디뎠다면 꼭 한 번쯤 생각해봐 주길 바란다. 공무원이 되고 싶다 보다는 어떤 공무원이 되고 싶은지, 이곳에서의 시간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지, 슬럼프가 닥쳐왔을 때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를 말이다.  


더불어 현직에서 일을 하고 있다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언젠가 다 도움이 될 것이라 믿어주면 좋겠다. 공무원 조직과 업무는 주민이 필요로 하기에 존재한다. 내부적으로 서열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쓸모없는 일은 하나도 없다. 그렇기에 나의 역할은 절대 보잘것없는 것이 아니며 하찮은 일에서도 배울 것은 분명히 있다. 시간이 지나 뒤돌아 봤을 때 그때 9급~8급 때 시간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걸 느끼는 날이 온다. 






구독자님들 잘 지내시는가요? 그동안 정말 재난으로 격동의 시간이었고, 개인적으로도 이런저런 일이 많아서 브런치에 글이 뜸했네요. 이 매거진을 책으로 만드느라 시간이 걸리기도 했네요. 얼마 남지 않은 2020년이지만 안전하게 한 해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

매거진의 이전글 동서기의 잡초 뽑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