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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ARANTH Dec 22. 2020

고시실 사람들

“올해도 그냥 이렇게 가는구나. 합격은 언제쯤......”


공시생일 때 맞이하던 겨울은 유독  추웠다. 봄부터 가을까지 쉴 새 없이 국가직, 지방직 시험을 치고 나서 아무 소득 없이 맞이하던 겨울. 거리에 울려 퍼지던 크리스마스 캐럴에 연말이 다가왔음을 직감하고, 곧 있으면 한 살 더 먹는다는 생각. 그리고 뒤이어...... 내년에도 합격 못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 분명 서글펐지만 그리 서글프지도 않았다. 나만 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고시실 식구들도 다 떨어졌기 때문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로 마음을 먹고 나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학교에서 운영하는 고시실에 입실 신청서를 낸 것이었다. 말이 좋아 고시실이지 실상은 학교 후문 구석 어디쯤 건물 꼭대기 층에 독서실 책상을 몇 개 둔 어수선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운이 좋았던 것인지 내가 입실하고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고시실은 대대적인 개편에 들어갔다. 학교에 기숙사가 새로 생기면서 기존에 쓰던 낡은 기숙사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새로운 고시실을 만들고, 운영 방법도 개편했다. 사법고시나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방, 7급‧9급 공무원‧회계사‧관세사를 준비하는 방이 생겼다. 한 방의 정원은 20명 남짓이었고 동영상 강의실, 휴게실, 그리고 사물함이 딸린 큰 독서실 책상까지 구비된 완벽한 공부방이 갖춰졌다. 가장 큰 변화는 입실생에 한해 소정의 동영상 강의비와 책값이 지원되는 것이었다. 나에겐 집에 손을 벌리지 않고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고마운 제도였다. 


선의의 경쟁자들이 모인 고시실이었지만 가족 같은 푸근함이 넘쳐났다. 가장 어렸던 나, 07학번부터 졸업생이었던 00학번 선배까지. 법학과, 행정학과, 경제학과, 경영학과에서 각자의 목표를 가지고 이곳을 찾아왔다. 소규모 인원으로 한 방에 모여 있다 보니 매일 얼굴을 마주치며 생사를 확인하고, 시험 정보도 공유했다. 


각 시험 준비 방에는 실장이 있었다. 방의 운영 규칙에 따라 입실생들의 질서를 유지하고, 입실생 강퇴와 선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막강한 자리였다. 나름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였던 탓에 남자 선배들 사이에서는 감투를 차지하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기싸움을 펼치곤 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경제학과 선배 A와 법학과 M 선배의 기득권 경쟁. 


A 선배는 그 당시 내 눈에는 훈훈했던 얼굴에 185cm가 되는 큰 키를 가지고 있었다. 키다리 아저씨 같은 외형과 중저음의 목소리는 그 당시 나의 상상 속에 존재하던 대학교 선배의 이상적인 모습을 다 갖춘 사람이었다. 선배는 나를 항상 꼬맹이라고 불렀다. 그는 회계사 시험을 오랫동안 준비하고 있었지만 합격은 쉬이 찾아오지 않았다. 가끔 그는 여자 친구와 나이트클럽을 다녀오곤 했다. 그럼 그다음 날 항상 옆자리에 있던 나에게 후기를 들려주었다. 한참 이야기를 해주고 나서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꼬맹이는 아직 어려서 그런데 절대 가면 안 돼. 특히 혼자는 더 안 되고. 거기 위험한 곳이야. 나쁜 남자들이 수두룩 하거든. 그래서 난 내 여자 친구랑 늘 함께 가는 거야.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하며 학교 밖 세상이 제법 무서운 곳이란 걸 알려주곤 했다. 


M 선배는 노무사 시험을 준비했었다. 그가 M으로 불리는 건 이름 때문이 아니라, 당시 얼굴이 신화의 이민우를 닮았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나름 유명한 인사였다. 한창 이민우가 M이라는 이름으로 솔로 활동을 왕성하게 할 때였다. 그 선배는 이민우의 M style을 부르며 흐느적거리는 춤과 함께 늘 몸에 딱 붙는 검은색 나시를 입고 다녔다. 추우나 더우나 사계절 그와 한 몸으로 다니던 그 검정 나시가 왜 그리 민망해 보였던지.


고시실 개원 초반에는 A 선배가 먼저 실장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고시실 운영에 크고 작은 일들이 생겼고, 그는 자진해서 그 자리에 내려왔다.  A 선배는 그 이후로 고시실에서 얼굴을 자주 볼 수 없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계사 시험을 접었다. 마지막 인사를 하던 날. 그는 늘 그랬듯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꼬맹이는 열심히 공부해서 꼭 공무원 시험 합격하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A 선배. 그 후로 그의 소식은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그 뒤로 M 선배가 실장이 되었다. 우리는 한 달에 한번 정도 주말 낮에 대청소를 했다. 대청소 날이면 치약 하나와 마른걸레를 들고 왔다. 바닥에 치약을 쭉 짜 놓고 일열 종대로 쭈그리고 앉아 마른걸레로 닦아 나가는 것이 M 선배가 군대에서 배운 가장 효과적인 청소 방법이었다. 청소 후에 함께 둘러앉아 시켜먹는 자장면과 탕수육은 그리 맛있을 수가 없었다. 


고시실은 남자와 여자가 골고루 섞인 곳이다 보니 러브 라인도 당연히 있었다. 하지만 수험생에게 연애는 사치였는지 아니면 서로에 대한 마음의 크기가 달랐던 것인지 늘 짝사랑에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뜻대로 되지 않는 시험은 물론이거니와 혼자 끙끙 앓는 연애로 가슴이 아픈 당사자들의 속은 다 헤아릴 순 없었지만, 수험 생활에서 별 다른 재미를 찾을 것이 없었던 우리에겐 나름 생활의 활력소였던 남들의 연애사였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보내는 시간은 많았지만 수험생에겐 일 분 일 초가 소중했던 만큼 서로 얼굴을 보고 밥을 먹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꽤나 오랫동안 함께 했기에 여행도 한번 갈 법했지만 계획할 때마다 번번이 무산되었다. 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쉽게 그럴 수 없는 것이 수험생의 양심이기도 하다. 우리가 펜션에서 고기를 굽는 순간에도 전국의 경쟁자들은 책을 한자라도 더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고시실을 떠나는 순간 불안 해지는 게 흔한 수험생의 마음이었다. 공부를 하지 않아도 고시실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어야 위안이 되는 게 수험생의 당연하고도 슬픈 심리였다.  그래서 멀리 나가는 대신, 학교 뒷문에 있는 치킨 집을 자주 찾았다. 그 당시 최고의 히트 상품이었던 파닭에 생맥주 한잔 마시고 다시 고시실로 돌아오는 것. 그것이 우리의 가끔 있는 회식이자 소소한 일탈이었고 친목을 다지던 시간이었다. 


일찌감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또래들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던 나. 그런 나에게 고시실은 아무것도 기억할 것이 없던 대학생활의 추억 한 페이지를 유일하게 장식한 곳이었다. 그땐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별로 웃을 일이 없었다. 그런 나에게 선배들의 예쁨과 보살핌은 상처로 얼룩졌던 내 마음을 감싸주는 따뜻함이었다.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A 선배의 손길에 설레던 마음도, 스물두 살의 생일날 B 선배가 내민 어린 왕자 책의 일부분을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 가끔씩 학교를 찾을 일이 생기면 고시실 근처를 서성거리곤 한다. 멀리서 바라만 보아도 저절로 그리운 미소가 지어지는 곳.  그때 스무 명의 우리 방 식구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 살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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