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국 전쟁을 겪은 병사 부부 이야기
오늘은 며칠 동안 곁에 두고 있는 책에서 발췌한 사랑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이 책의 서술/구술자들은 대부분 여성이다. 열다섯 살 내지는 스물대여섯 살 소녀 병사로 2차 세계대전에 소련군으로 참전해서 전쟁을 치른 사람들이다. 러시아(구 소련)는 2차 세계대전 독-소 전쟁을 대조국 전쟁이라고 부른다.(나는 이 사실을 이 책을 읽으면서 배웠다)
군사와 전쟁사에 무지한 내가 대조국 전쟁 당시 소련군이 얼마나 인력과 물자가 부족했는가에 대해 서술할 수는 없다. 다만 역사소설가이자 전쟁 소설가인 낭군의 말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1개 사단이라고 하면 1만 5천 명 규모인데 전쟁 말미에 소련군 1개 사단은 3천 명 정도인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군인이 부족해서 소녀들을 징집해갔는가? 아니, 그녀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바에 따르면 그녀들은 스스로 자원해서 전선으로 나갔다.
내 나라는 소중하며 내 나라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교육을 받고 자랐고, 그렇게 행동하는 아버지의 등을 보며 자랐기 때문이다. 마을에 군대에 갈 수 있는 남자가 없어지자 그 소녀들은 스스로 위원회를 찾아다니고, 편지를 보내고, 군용 트럭에 숨어서 병사가 되었다.
그러나 내가 지금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작은 소녀들이 전선에서 24시간 이레씩 병사로서 행군을 하거나 전투기 조종사, 취사병, 세탁병, 군의관, 간호위생병, 위생병 등으로 살고 죽은 내용들이 아니다. 그 귀한 이야기들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 소중하게 담겨있으니 읽어보시길 권해드린다.
이 책에서 읽은 사랑 이야기 두 편을 옮겨왔다. 전쟁이 끝나고 만신창이가 된 몸과 마음으로 살면서 아무것 없이 맨몸뚱이로도 살아있었기 때문에 행복했다고 말하는 여인, 전쟁 중 알게 된 한 남자 때문에 후방의 병원에서 최전방으로 달려가는 여인, 이 두 사람의 귀한 구술 중 일부이다.
행복은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어 세상이 변한다고 해도 그대로 가치롭다. 그리고 그 행복의 가장 근원적인 기쁨 또한 그대로이다. 존재한다는 것. 내가 너와 우리 서로가 살아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우리는 모두 죽어가는 생명체이므로 현재 이렇게 살아있음이 행복이고 감사이다.
222쪽
발렌티나 파블로브나 추다예바, 중사, 고사포 지휘관
(전략)
제대하고 남편과 함께 민스크로 왔어. 이불은 고사하고 변변한 집 하나 포크 하나 없이 거의 맨몸으로 온 거야…… 외투 두 벌과 군복 두 벌, 그게 우리가 가진 전부였어. 어느 날 우연히 옥양목으로 된 아주 좋은 지도를 하나 발견했어. 냉큼 가져다가 물에 담갔지…… 아주 커다란 지도였는데…… 자, 이게 바로 그 지도야. 우리집 최초의 이불이지. 나중에 우리 딸이 태어나자 이걸로 포대기를 했어. 이 지도로…… 세계 정치지형도였던가, 아마 그랬을거야…… 우리 딸은 트렁크 안에서 잤어…… 합판으로 된 트렁크에서. 남편이 전선에서 돌아올 때 가지고 온 건데, 요람 대신 사용했지. 우리가 가진 거라곤 사랑, 딱 그거 하나였어. 그래, 그랬지…… 한번은 남편이 오더니 그러는거야. '갑시다. 누가 밖에 낡은 소파를 버렸더라고……' 그래서 남편하고 같이 밤에 그 소파를 가지러 갔어. 아무도 안 볼 때 가져오려고 밤에 갔지. 아, 그 낡은 소파 하나에 얼마나 행복했던지!
사는 게 힘들어도 우리는 행복했어. 친구는 또 얼마나 많았는데! 힘든 시절이었지만 우리는 절망하지 않았어. 감자 하나를 삶아놓고서도 서로 전화를 걸었지. '우리집에 와. 설탕을 좀 구했어. 차나 한잔하자.' 누구도 우리 위에 있지 않았고 누구도 우리 아래 있지 않았어. 우리 중에 양탄자나 고급 식기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아무도……
하지만 우리는 행복했어. 정말 행복했지.
왜냐하면 우리는 살아남았으니까. 이야기하고 웃을 수 있었으니까. 마음껏 거리를 돌아다니고……
나는 늘 기쁘게 삶을 누렸어. 사실 실제 누릴 건 거의 없었지만. 주위를 둘러봐야 깨진 돌무더기들에 나무도 성한 게 없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사랑이 우리 삶을 따뜻하게 했어.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서로를 필요로 했고, 우리도 서로를 필요로 했지. 나중에야 각자 자기 일, 자기 집, 자기 가족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때는 여전히 다들 함께였어. 전선의 참호에서처럼 서로 어깨와 어깨를 맞댔지……
(후략)
258쪽
올가 야코블레브나 오멜첸코, 저격중대 위생사관
(전략)
한번은 의사가 헌혈할 때 내 주소를 적어놓자고 제안하더라고. 혹시 내 피를 받은 사람이 갑자기 나타날지 누가 아느냐면서. 그래서 종이에 주소를 써서 병에 밀어넣었지.
그러고 나서 얼마 후였어. 두 달 정도 지났을까. 당직을 마치고 내 방에 와서 잠이 들었는데 누가 나를 깨우는 거야.
-일어나, 일어나보라니까. 네 오빠가 왔어.
-무슨 오빠? 나는 오빠 없는데.
내 방은 기숙사 맨 꼭대기층이었어. 그래서 1층으로 내려가 누가 왔는지 봤지. 웬 젋고 잘생긴 중위가 서 있더라고. 내가 물었지.
-여기 오멜첸코를 찾은 사람 있나요?
그러자 그 중위가 대답했어.
-내가 찾았어요.
그러고는 나하고 의사하고 같이 쓴, 내 주소가 적힌 쪽지를 보여주는 거야.
-자, 여기…… 나는 이제 당신하고 피를 나눈 형제에요……
사과 두 개하고 작은 사탕 봉지를 가져왔더라고. 그 시절만 해도 사탕은 어디 가서 구할 수도 없는 아주 귀한 것이었지. 세상에, 그렇게 맛있는 사탕이 또 있을까! 병원장을 찾아가 그랬어. 오빠가 왔다고. 그래서 휴가를 받았지. '극장에 갑시다!'중위가 나를 극장에 초대했어. 나는 태어나서 그때까지 극장이라는 데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어. 그런데 극장엘 가게 된 거야. 게다가 남자하고. 잘생긴 청년하고. 그것도 장교하고!
며칠 후 중위는 보로네시 전선으로 떠났어. 작별인사를 하러 왔기에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어줬지. 휴가를 받았다면 좋았을 텐데, 하필 그때 부상병들이 잔뜩 밀려들어서 휴가를 받을 수가 없었거든.
나는 한 번도 편지를 받아본 적이 없었어. 편지를 받는 게 어떤 건지도 몰랐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나한테 편지가 온 거야. 삼각형으로 된 편지봉투를 펼쳐보았더니 이렇게 쓰여 있었어.
'당신의 친구, 기관총소대 지휘관이…… 장렬하게 전사했음을……' 나와 피를 나눈 형제, 바로 중위의 전사를 알리는 통지서였어. 그 사람은 고아였거든. 그래서 아마 그 사람한테 있던 유일한 주소가 내 주소였던 모양이야. 내 주소…… 그 사람은 전선으로 떠나면서 나한테 어디 가지 말고 병원에 있으라고 신신당부했어. 그래야 전쟁이 끝나고 나를 쉽게 찾을 수 있다고. '전쟁중에는 서로를 잃어버리기 쉬워'라며 걱정했지. 그러고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 사람이 죽었다는 편지를 받은 거야…… 갑자기 무서워지더군. 쿵쿵쿵 심장이 마구 뛰고……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전선으로 가겠다고 결심했지. 가서 내 피에 대한 복수를 하자고. 이제 내 피가 분명 어딘가에 쏟아졌다는 걸 알았으니까.
(후략)
- 스베틀라나 알렉시에비치 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문학동네
*그러나 또 반면에, 당신이라는 존재가 사라진다면, 나라는 존재가 사라진다면 그것은 불행인 것인가. 우리는 인간이기에 단순히 생명=존재가 아님을 안다. 내 안에 너의 기억이 있고 당신 안에 나에 대한 기억이 있다면 우리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 기억이 물질일 수도 있고 그저 추억일 때도 있다. 그래서 나는 귀하고 소중한 당신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도록 오늘도 애쓰는 것이다. 사랑하는 당신 안에서 존재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