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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범한사람 Jan 24. 2016

대전 독수리에 합류한 코치들

김성근 감독님이 데리고 온 코치 그리고 인스트럭터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그저 공부만 잘 해 다오


작년 시즌 그리고 올 시즌 스토브리그 최고로 기사를 많이 내는 팀은 LG, 롯데, KIA 이 세 팀이 아니었다. 그저 점잖은(?)을 줄만 알았던 충청도 대전 독수리였다. 팬들의 성화에 이 팀은 '정말' 감독을 교체하였고 몇 년째 어마어마한 금액을 '쏟아 부어가며' 가을 야구에 대한 집념을 불사르고 있다. 올 해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정우람-심수창을 독수리 둥지 안으로 품는데 성공하였다. 하여간 최근 3년간의 모습은 '얼마든지 돈은 써 줄 테니 부디 공부만 잘 해다오'하는 부잣집 부모님(?)과 같은 태도를 보여주었다. 


작년 시즌에는 최고의 교장 선생님(?)을 데리고 오는데 성공하였고 그에 따른 교과서와 참고서 심지어 선생님들(?)까지 아낌없이 사 주고 붙여 주었다. 올 해는 가을야구라는 심화 문제(?!)에 도전하기 위해 선생님을 교체하고 강화 해 주었다. 여기에 그 문제를 풀어내는데 필요한 우등생 영입에도 총력을 기울였다. 물론 기존 우등생인 김태균도 앉히는데 성공하였다. (기억하는가? 김태균은 올 해 FA 계약을 마친 후 선수 좀 보강 해 달라고 구단에 투정(!!)까지 부렸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은 하였지만, 대부분의 야구 팬들이 우등생의 영입에 팬들의 모든 눈과 귀를 준 사이에 잘 못 본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일본인 코치 또는 인스트럭터들이 꾸준히 작년부터 오고 갔거나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SK 시절의 김성근 감독님도 상당수의 일본인 코치 또는 인스트럭터들을 영입하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리 '대수로운' 현상은 아니지만 모든 관심이 선수와 감독에 쏠린 사이에 그들을 '보좌'하러 온 분들의 면면을 보는 것도 또 다른 스토브리그의 재미가 아닌가 생각한다. 올 해 대전 독수리들을 조련하려 새로 온 코치 또는 인스트럭터들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해 보자. 


(한화 팬이 아닌 관계로 누락 할 수 있습니다.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새로 영입한 독수리 코치진


이번 신규 영입 코치진들의 경우 가장 큰 특징은 투수코치인 니시모토 타카시, 배터리 코치인 후루쿠보 켄지와의 계약 종료 후 상대적으로 명성이 조금은 떨어지는(?)는 코치를 영입 한 점이 눈에 띈다. 다만 하나 독특한 점이 있다면 새로 영입한 코치의 경우 과거 한 팀의 투수진을 재건하는데 성과를 낸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새로 온 배터리 코치는 필자가 미루어 짐작 해 보건데 어마어마한 성깔(?!)의 소유가 같다. 현재 대전 독수리의 경우 과거에 비하면 물론 전력은 올라 가 있지만 어떤 틀이나 그런 부분에 있어서 부족하다는 점을 김성근 감독님이 느끼지 않았는가 판단한다. 하나 하나 면면을 살펴 보도록 한다.


小林 誠二(고바야시 세이지)


지역 민방에서 해설자로 활동할 시절의 모습. 출처는 히로시마 토요 카프 지역방송 블로그.


태어나서 약 4개월 후에 아버지가 사망하는 바람에 어머니가 농협에 근무를 하며 고바야시 코치를 키워낸 이력이 있다. 중학교 졸업 후 히로시마 공업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였는데 1975년 팀 내 에이스 투수로서 활약을 하였다. 1976년 드래프트 4위로 고향 팀 히로시마 토요 카프의 지명을 받아 입단을 하였다. 입단 할 당시에는 팀 내에서도 1, 2번째를 다투는 강속구파 투수였지만 어깨 통증 때문에 사이드 암 투수로 전향하였다.

 

별 다른 실적이 없던 중 히로시마 토요 카프에서 1981년 세이부 라이온스로 이적을 하였다. 이적 후 팜볼을 습득하였고 그 덕분에 팀 내에서 두각을 나타내 주로 중간계투, 필승조로 활약을 하였다. 1982년 세이부 리그 우승을 견인하기도. 1984년 얄궂게도 세이부에서 고향팀 히로시마 토요 카프로 다시 트레이드로 돌아왔다. 그 해 중간, 필승조로 활약을 하였고 팀도 우승을 해 최우수평균자책점 투수 타이틀을 받았다. 고바야시 투수 코치가 한 가지 특이한 기록이 있는데 과거 세이부 라이온스, 그리고 히로시마 토요 카프에서 일본 시리즈 1차전 승리투수 경험을 각각 해 봤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 프로야구 사상 첫 번째 기록이라고 한다.


하지만 팜볼을 던지는데 중요한 팔꿈치가 다시 부상을 입었고 더는 던질 수 없자 89년 30세에 은퇴를 결정하였다. 이 후 히로시마 지역 TV에서 야구 해설을 담당하였다. 지역 내에서는 상당한 인기를 얻기도 하였지만 2005년부터 주니치 드래곤스에서 투수 코치 역할을 담당했는데 투수 왕국 (주니치는 전통적으로 투수를 잘 키워내는 팀으로 일본에서 손꼽히는 팀이다.) 건설에 힘을 보탰다. 


2011년 당시 주니치의 오치아이 감독이 사퇴를 표명하자 본인도 팀에서 나와 다시 고향 생활을 하며 음식점을 하기도 하였다. 식당을 접고 다시 지역방송 해설자 활동을 하면서 소일거리(?)로 하루하루 지내던 중 김성근 감독의 제안을 받았고 2016년부터 한화 이글스 코치를 담당한다.


통산 성적은 222경기 출장 29승 15패 20세이브 3.70


宮本 好宣(미야모토 요시노부)


도지샤 대학 출신의 우투수였다. 간사이(関西) 6대학 리그에 21경기 등판하여 3승 6패의 성적을 남겼다. 바로 프로에 뛰어들지는 않았고 사회인 야구를 거쳐 1975년 드래프트 6위로 일본햄 파이터즈에 입단하였다. 

요즘이야 183CM은 운동선수로서 평범한 키지만 그가 활약했던 시기는 1970년대라는 점을 감안하였을 때 큰 키를 보유한 선수였다.  그는 당시 우완 정통파 투수였는데 직구, 커브, 슬라이더, 포크볼을 장착한 장신의 투수였다. 선수 시절의 주특기 구종은 직구, 슬라이더. 


1981년 현역에서 은퇴를 한 후 프로 구단 일본햄과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의 스카우터를 담당하였다. 생각보다 대한민국과의 인연이 상당한 코치인데, 과거 고양 원더스, 성균관대학교 야구부 그리고 SK 와이번스 등 한국야구팀의 인스트럭터로 활약을 하였다. 최근에는 2014년 넥센 히어로즈의 투수 인스트럭터로 활약을 하였고 2015년에는 넥센의 3군 투수코치로 활약을 하였다. 2016년 한화 이글스의 코치직을 수락하면서 다시 김성근 감독과의 인연을 이어간다.


통산 성적은 33경기 등판 2승 4패 5.08


馬場 敏史 (바바 토시후미)

사회인 야구를 거쳐 1989년 드래프크 5위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 입단을 하였다. 입단 할 때부터 수비가 좋다는 평가를 받아서 신인 1년차부터 54경기를 수비요원으로 출장하였다. 이 후 1993년 오릭스 블루웨이브스로 이적을 하였다. 오릭스 시절에는 주전 3루수로 정착을 하였는데 95년 115경기 시합 출장해 처음으로 규정타석을 채웠다. 96년 111시합 출장을 하였는데 이 2년동안 우승을 2년 연속 차지하는데 공헌하였다. (95년 리그우승, 96년 리그우승 및 일본시리즈 우승)


 하지만 팀에서 어린 선수들 기용을 통한 리빌딩으로 방향을 잡는 바람에 97년 시즌 도중 트레이드로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넘어갔다. 야쿠르트 시절에는 2루수로 활약을 많이 하였는데 젊은 내야수들이 하나 둘 두각을 나타내는 탓에 출장 기회가 점점 감소하였고 2000년에 현역 생활을 접었다. 


은퇴 후 오릭스에서 내야수비 및 주루코치를 담당하였고 (2001~2003) 이 후 야쿠르트에서 수비 및 주루코치 (2004~2008)을 담당하였다. 2009년 잠시 오릭스 내야수비코치를 담당했고 2010년부터 2015년까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의 코치를 담당하였다. 2016년부터 한화 이글스에서 코치를 담당한다.


수비가 워낙 좋았던 선수 시절 덕분인지 통산 성적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아도 수비 코치로서 잔뼈가 굵은 선수 출신이다. SK가 최정 선수를 지금의 정상급 3루수로 키워내는데에는 후쿠하라 일본인 코치의 공이 상당했다고 하는데 김성근 감독도 이러한 부분을 어느정도 생각을 하고 이번에 일을 맡기지 않았을까 판단한다.  


통산 675경기 출장 328안타 12홈런 119타점 .242


골든글러브상 2회 수상 (1995, 1996)


오키 야스시 (沖 泰司)


메이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 야구에 입단을 하여 두각을 나타내 1986년 일본햄 파이터즈에서 4순위로 지명 받아 입단하였다. 프로에서는 그렇게 빛을 보지 못 하였는데 포수로 4시합, 1루수 5시합, 2루수 2시합, 3루수 3시합, 외야수로는 2시합에 나온 기록이 있다. 일종에 멀티 플레이어로 팀에서 기용을 하였는데 특이하다면 1986~87년에 팀에서 포지션을 외야수로 1988~89년에는 포수로 1990년에는 내야수로 등록을 하였다. 


별 다른 실적없이 1990년을 마지막으로 팀에서 사라진 그는 2005년 고향 에히메의 독립야구단에서 코치직을 맡았다. 2006년 독립야구단의 감독을 맡았는데 2008년 리그 팀 첫 후기 우승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욱(?)하는 성질머리가 있는지 2008년 4월에 심판 판정에 불복해 심판을 폭행한 이력이 있기도 하였고 7월에는 심판에게 폭언을 퍼 붓는 과감성(?)을 선보였다. 2010년에는 6월, 7월 각각 1번씩 심판에게 폭언을 선사(?)하여 퇴장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구단에서도 엄중주의를 받은 그는 결국 시즌이 끝나고 10월에 구단을 나왔다. 


2012년부터 고양 원더스의 배터리 코치 담당을 하였으며 2014년부터 KT의 배터리 코치를 담당하였다. 2015년까지 KT에서 활약을 한 그는 2016년 다시 김성근 감독을 만나 한화 이글스에서 활약을 한다. 일단 열정은 가득하지만 선수들이 잘 따라오지 못 하거나 말을 안 들으면 바로 빠따(?)를 들고 엉덩이에 폭격을 가 할 정도로 화끈한 성격을 소유 한 듯 하다. (농담입니다.) 하여간 열정은 상당하고 꼬장꼬장 해 보이는 성격의 소유자 같은데 어떻게 독수리 포수진들과 호흡을 맞출지도 한 번 눈여겨 볼 만 하다.  


통산 36경기 출장 4안타 0홈런 0타점 .182


새로 오고 간 독수리 인스터럭터진


대전 독수리의 또 하나의 눈 여겨 볼 움직임이 있다면 정규 선생님들 외에 과외 선생님(?)들도 상당한 관심을 기울여 데리고 온 점이 눈에 띈다. 잘 모르는 팬들이 보더라도 "어?!"하고 외칠만한 이름도 눈에 띄는데 하나 하나 면면을 보면 데리고 온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와타나베 슌스케 (渡辺 俊介) 


정말 바닥에서 나온다는 느낌의 투수. 출처는 일본 야후.


지면에서 거의 붙어서 나오는 투구폼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정통 잠수함 투수 출신이다. 전성기는 2003년에서 2005년까지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2005년 15승 4패 2.17, 팀 일본 시리즈 우승) 이 후 2008년 13승으로 다시 재기 하는 듯 싶었지만 이 후 급격하게 모든 기록이 가라앉으면서 2013년 4패만을 남긴 채 팀을 떠났다. 이 후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에도 초청 받았지만 별 다른 실적을 실적을 남기는데는 실패했다. 김성근 감독의 초청으로 2015년 11월에 인스트럭터러 왔었다. 당시 어린 한화 사이드, 언더핸드 투수들이 상당히 질문을 많이 했다고 하는 기사를 보아 선수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배우려고 하지 않았는가 판단한다. 


볼이 지면에서 붕붕 떠서 오는 듯한 느낌 때문에 일반적으로 타자들의 타격 포인트를 잡는데 쉽지가 않았던 투수였다. 그가 남긴 인터뷰 중 독특한 것이 있는데 "상체의 근력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반면 하체에서 부터 서서히 힘을 가해서 채찍처럼 휘두르는 느낌으로 던지는 이미지어야 한다."고 한 것. 아마 인스트럭터로 와서 이런 부분을 선수들에게 강조하지 않았나 판단한다. 현역 시절에도 느린 볼에 비해 상당한 삼진을 쌓아 올린 경험이 있다는 점을 보았을 때 이러한 부분을 선수들이 배워야 하지 않을까 싶다. 


평균 구속은 120KM대로 유희관 선수와 비슷하지만 싱커, 투심, 커브, 슬라이더 그리고 간혹 체인지업도 섞어 던졌기 때문에 프로에서 살아 남았었다. 하나 특이한 점이 있다면 2006, 2007, 2009년 득점 지원율이 리그 최하위를 기록했었다. 꽤나 불운했던 투수였던 것.


통산 성적은 87승 82패 1홀드 3.65


카와지리 테츠로 (川尻 哲郎) 


선수시절의 모습. 그는 꽤 준수했던 투수였었다.


우리에게는 이종범 선수의 몸에 맞는 볼로 인하여 그닥 좋은 기억이 없는 선수지만 본래 한신 타이거즈 시절 팀 내 꽤 잘 나갔던 선수였다. 1996년 13승도 1998년 10승을 기록했다. 당시 한신 타이거즈가 지금과는 달리 워낙 약체팀이었기 때문에 (LG, 롯데가 찍었던 비밀 번호를 이 팀이 90년대 찍었다고 생각하면 쉽다.)  활약을 하였어도 그렇게 재미를 보기가 힘들었었다. 이 후 2000년에도 10승을 올렸지만 성적이 뒤로 가면서 가라앉는 바람에 2004년 지금은 사라진 킨테츠로 트레이드 되었다. 


2005년 은퇴 후 재미난 이력이 있는데 지진 방지 회사에 들어가 일을 하였다. 이유인 즉 과거 프로선수시절 소속팀 한신 시절 1995년 고베 대지진을 경험 한 탓 때문이었다. 이 후 지역 민방에서 해설자로 활약을 하기도 하였는데 우연히 독립리그 경기를 보러 갔다가 코치로 일을 해 달라는 제의를 받아 움직였고 2014년에는 감독으로 활약을 하였다. 취임 후 리그 우승도 이끈 경험도 있다. 2016년 1월부터 임시 인스트럭터로 활약하고 있다. 


입단 당시에는 직구 140KM를 넘었지만 해가 갈수록 구속이 가라앉는 바람에 변화구를 다듬었다고 한다. 슬라이더, 슬로 커브, 싱커, 역회전볼을 던져 타자와 상대를 해 왔다. 옆구리 투수들이 전체적으로 중간계투로 활약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와지리의 경우 선발로도 많이 활약을 해 일본에서는 꽤 귀중한 사이드암 선발 자원으로서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통산 성적은 60승 72패 3세이브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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