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는 어떤 일은 하나요?” - 음, 교수님의 글을 받아 책을 만드는 일을 하죠.
“좋네요. 하지만 저는 글을 쓸 여유가 없어요. 아무래도 교수는 책보다 논문을 써야 해요. 하지만 번역이라면 모를까.” - 번역은 괜찮으세요? 그러면 글을 쓰는 것보다 번역을 한번 해보면 어떨까요. 이렇게 저렇게요.
“감각 있네요.”
감각이 있다는 칭찬을 들었다. 기분이 좋았다. 일희일비. 나는 칭찬을 좋아한다(칭찬에 약한 편). 오랜만에 듣는 칭찬이라 기분이 더 좋았다. 그래, 말 그대로 오랜만이었다. 최근에 여러 책들을 기획하려 노력했지만 매번 수포로 돌아가서 속상했는데, 그래도 오늘은 꽤 뿌듯함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자신감도 조금 붙고.
나는 과거에 비교적 ‘가벼운 책’을 기획하는 편이었다. 한 번 더 생각하는 방법을 몰랐고, ‘그냥 이거 괜찮은 거 같은데’ 하면서. 하지만 주변 편집자 선배들과 대화를 나누며, 어떻게 하면 좀더 의미 있는 책을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아무래도 누구와 함께 일하느냐, 이게 굉장히 중요하다. 책을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과 함께 일하면, 나도 어느새 책을 가볍게 생각한다. 하지만 책 한 권을 신중하게 만드는 사람과 함께 일하면, 나도 책 한 권 한 권을 신중하게 만들게 된다.
내가 아는 편집자 A는 그 누구보다 책 한 권을 신중하게 만든다. 이 책 어때요? 몇 년에 출간한 책인데, 이런 내용을 담고 있어요. 의미 있지 않아요? 어떨 거 같아요? 음, 괜찮네요. 그쵸. 괜찮죠. 이건 어때요. 이건 이래서 이런 의미가 있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음, 좋네요. 번역은 누가 하면 좋을 거 같고, 이런 스타일로 저렇게 하면 좋을 거 같아요. 아, 눈빛 왜 이렇게 초롱한가!
B는 글을 읽기 시작하면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를 정도로 집중한다. 읽고, 또 읽고, 또 읽은 글을 또 읽는다. 뭐해요? 글 읽어요. 그건 또 왜 읽어요. 제대로 했나 보고 있어요. 그만 봐요. 네, 이거까지만 읽고요. 어제는 몇 시에 들어갔어요. 9시요. 9시요? 네, 9시 30분인가. 주말에 안 한 게 어디예요. 주말에 왜 해요. 그러게요. 버스에서 보는 거보다 나아요. 버스에서 일을 왜 해요. 그러게요.
A부터 F까지, 왜들, 다들, 저렇게들, 열심히 일하는지. 회사에서 좀더 집에 일찍 가라고 퇴근 시간을 줄여 주었는데, 하나도 집에 가는 사람들이 없다. 도대체, 왜.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건데! 저기, C. 집에 안 가세요? 네, 곧 가려고요. 왜 안 가요. 좀만 더하고요. 가세요. 네. 가라니까요. 네, 먼저 가요. 진짜 궁금해서 그런데, 왜 안 가요? 사실 지금부터 제일 집중이 잘 돼요. 아무도 말 안 걸잖아요. 그러니 말 걸지 말고 가요.ㅋ 응? 네.
E, 뭐해요. 보면 몰라요? 아니, 그러니까 그걸 왜 E가 해요. 그럼 누가 해요. 누군가 하겠죠. 그러니 제가 해요. 그래요, E가 다 해요.
F, 잘 지내요? 네. 요즘 왜 말을 안 거는지 궁금했어요. 바빠 보여서요. 맞아요, 조금 바빴어요. 그래서 말을 걸기가 어려웠어요. 바빠도 괜찮으니 언제든 필요하면 일 주세요. 제 일이잖아요. 네 고마워요. 고맙긴요, 제 할 일인데요. 그래도 고마워요. 그래요, 그럼.
어디서 감각이 생겼나 했더니, 함께 일하는 사람들 덕분에 감각이 생겼나 보다. 아주 조금이지만 인내심도 조금, 기획력도 조금, 편집력도 조금, 묵묵하게 일하는 것도 조금,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는 것도 조금, 함께 일하는 방법도 조금, 책을 만드는 신중한 태도도 조금, 아주 조금씩 이렇게 일을 배워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