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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이진 Dec 22. 2018

가게 문을 열다

여름날의 뜨거운 시작

첫 손님을 아직 기억한다. 양복에 노트북 배낭을 메고 안경을 쓴 3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 손님. 4인용 창가 자리에 혼자 앉아서 등심 돈가스를 주문했다. 너무 긴장되고 떨려서 첫 손님으로 와주셔서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도 전하지 못했다. 그다음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인테리어 공사에 오픈 준비기간을 포함해서 약 한 달을 문을 열지 않고 있었더니 평소에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았다. 궁금했던 분들이 오픈 날 많이 몰려왔던 것 같다. 몰려옴이라... 이후 벌어진 일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시나리오였다.


주방은 너무 당황스러웠다. 한 팀씩 한 팀씩 여유롭게 올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점심시간을 틈타 손님들이 한꺼번에 막 몰려오니 준비해둔 재료와 밥 같은 게 너무 빨리 동나는 것이다. 우리의 당황스러움은 안중에 없다는 듯 손님들은 계속 왔고, 어쩔 수 없이 계획에 없던 브레이크 타임을 걸고 부족했던 재료들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점심을 먹을 정신도 없었다. 그 주방 왕초보는 양배추 채를 써느라 엄청 고생했다고 한다.


오후부터는 한 명이 들어가도 비좁은 주방에서 5~6명이 난리부르스를 췄다. 조카가 오픈했다고 찾아왔던 W의 이모분들까지 일이 너무 많아진 주방으로 투입된 것이다. 아마 홀 손님이 이야기하는 소리보다 주방에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오고 갔던 말소리가 더 컸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지만 그것을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모든 재료가 초스피드로 사라지고, 부족한 물품들도 많아서 영업이 끝나고 11시가 다되어 장을 보러 갔다. 이모분들도 함께! 사업자 전용 식자재 매장에는 재료들을 대량으로 판매하고, 영업에 필요한 그릇이나 기타 물품들까지 다 판매한다. 6명이 왁자지껄 대며 이거 사라, 저거 사야 해, 하며 돌아다닌 기억을 떠올리면 괜히 기분이 좋다. 하루 종일 극도의 긴장 속에서 첫 장사를 했지만, 나름 손님들이 와서 생각 이상의 돈도 벌었고 든든하게 챙겨주는 지지세력들까지 있는 것 같고... 온 힘을 다해 뛴 경기에서 승리하고 난 이후의 기분이랄까? 오픈 전 까지만 해도 무언가를 구입할 수 있는 돈이 거의 없었는데, 다행히 첫날 벌었던 현금으로 장을 보았다. 이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인가?!


그날 밤이 떠오른다. 둘이 나란히 침대에 누웠을 때 찾아든 약간의 감격스러움. 이렇게 오래 서있어 본 적이 없어서 힘들어했던 다리 아래쪽에 베개를 깔아 피로를 풀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 피곤하다.
이렇게 하루 종일 일 해본 적 없어.
그래도 다행이다 그지.
손님이 적게 오는 것보다는
바빠도 많이 오는 게 낫지.
이렇게 하면 우리 부자 되는 거야?
내일도 힘들 거야. 얼른 자자.



초반에는 칠판으로 쓰고 지우는 입간판을 썼다. 메뉴가 추가될 계획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둘째 날도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이었다. 중간에 피클이 다 떨어져서 역시나 주방에 투입된 이모분들이 작업대도 없는 주방에 비집고 들어오셔서 무와 오이를 잘라 겨우 만들었다. 모밀 육수는 저녁에 거의 바닥이 났다. 바닥을 긁어서 나갔는데 손님이 너무 싱겁다고 해서 민망하고 죄송스러운 기억이 난다. 얼음만 많이 남아서 육수를 싱겁게 만들었던 것이다. 모밀 육수는 우리가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된 부산의 사장님께 받아서 쓰는데, 이렇게 빨리 나갈 줄 몰랐다. 그날 밤 사업자 마트에 또 찾아갔다. 부산에 주문은 했지만, 당장 내일 점심은 모밀을 판매할 수가 없기에 밤에 우리가 만들어서 팔아보기로 했다. 나는 맛이 달라지는 게 분명했기에 반대했지만, W는 오픈 한지 이틀 만에 다 떨어져서 못 파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가게로 다시 와서 비어있는 육수 통에 사 온 재료로 급조해서 만들었는데, 음, 정말 아니었다. 이건 이전 육수와 아예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W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맛. 다행이었다. 모조리 하수구로 흘려보냈다. 결국 다음날 점심에는 모밀을 팔지 못했다. 오픈은 6월이었고 한참 더운 때라 모밀이 잘 나가는 시기였는데 그날은 매출이 이전보다 꽤 줄어들었다. 처음 가게를 오픈했을 땐 돈가스 세 종류와 모밀로만 식사 메뉴가 구성되었기 때문에 모밀이 빠지니 타격이 컸다.



피클 물 끓이는 장면과 똑 떨어진 냉모밀




며칠이 지나니 재료를 얼마큼 준비해야 하는지, 미리 해놔야 하는 일은 무엇이고, 마감 후에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주문을 받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주문을 받고 난 후에 바로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등 세세한 행동 지침이 잡히고 요령이 생겼다. 그와 함께 점점 더 힘들어졌다. 처음에는 '오, 이렇게 손님이 오면 망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에 약간 신이 나서 그 힘듬이 크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좁은 공간에서의 생각과 감정 충돌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충돌과 강도 높은 노동이 매일 반복되는데, 게다가 이 일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깜깜했다.   


그 해 여름은 정말 느린 시간이었다. 3년 반 정도의 시간을 반추해 보면 내 기억엔 그 여름이 가장 길다. 시간은 달력으로 시계로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경험한 개인의 몸과 마음에 아로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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