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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이진 Jan 09. 2019

주방에서의 전쟁

3평의 공간이 우리의 세계였다. 그곳은 너무 좁았다. 두 세 걸음을 걸으면 모든 곳에 닿을 수 있었고, 서로 등을 지고 서있으면 엉덩이가 스쳤다. 각종 용기나 도구들은 테트리스처럼 빈틈없이 착착 쌓였다. 아주 작은 공간이라도 다 활용해야 했다. 그릇에 반찬을 담아 나갈라 치면 다른 이가 냉장고를 열고 있어서 길이 막혔다. 손님의 시선을 피해 잠시 숨어 쉬고 싶으면 냉장고 옆으로 잠깐 들어가서 기대거나, 바닥에 앉은뱅이 의자를 두고 쪼그려 앉아 온 몸을 구부리고 있었다.


음식을 만들어 나가기에도 버거운 크기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벌어졌고 우린 그곳에 투입된 후였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쩝. 즐기기는 힘들어도 살아남을 길을 찾아야 했고, 방법은 공간에 우리를 맞추는 것 밖에 없었다. 보통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의 몸에 맞추어 설계 하지만, 우린 우리의 몸을 공간에 맞추어 갔다(몸의 부피를 줄였다는 건 아니다. 그건 정말 잘 안 줄어든다.). 


그러다 보니 면을 삶고, 고기를 튀기고, 세팅을 하고. 각자의 역할이 있지만 그 역할은 파티션으로 매끈하게 구분된 사무실 업무와는 다르게 세팅되었다. 시간이 지나기 전에 누군가가 기름통 안에서 튀겨지고 있는 고기를 건져내야 했고, 모밀 면을 삶는 물이 냄비 밖으로 넘치기 전에 찬물을 부어주어야 했다. '삐빅 삐빅' 타이머가 울리면 손이 닿는 누군가가 중지 버튼을 눌러야 했다. 작은 공간 속으로 분초를 다투어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쏟아지면 발견하는 사람이 즉시 반응을 하게 되었다. 우리의 몸은 3평의 공간을 휘젓고 다니며 세 개였다가 다시 하나가 되었다가 다섯 개로 또 나뉘었다 하며 유연하게 움직였다.


당연히 그런 유연함이 바로 세팅된 건 아니다. 첫여름을 지나는 동안 우린 수없이 부딪혔다. 밥이 너무 질게 되거나, 주문을 잘 못 접수해 음식을 만들거나, 그릇을 깨뜨리거나, 음식을 쏟거나... 일이 손에 익지 않았고 일하는 사람끼리의 합이 아직 잘 맞지 않아 실수가 잦았다. 실수는 쉽게 용납되지 않았다. 이곳은 교육현장이 아닌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실수는 바로 손해로 이어졌기에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아오, 네가 이것만 여기 안 뒀어도...
참나,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사고 친 건 누군데 왜 나한테 책임을 돌려?


한숨 소리부터 불같이 화내는 소리까지... 주방을 넘을 듯 말 듯 무섭게 출렁대는 분노의 물결이 끝까지 차올랐던 적이 셀 수 없이 많다. 충돌의 결과로 유연함을 얻었다고 본다면 아주 긍정적인 관점이다. 가게를 엎어버리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우린 많이 화를 냈다. 어쩌면 가족이었기에 그만큼 숨김없이 서운해하고 크게 화를 냈을 수도 있고, 또 어쩌면 가족이었기에 버텼을 것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아이러니... 만약 남이었다면 누구든 도망가거나 얼마 되지 않아 셔터 내렸을 것 같다. 나도 도망가고 싶었던 적이 정말 많았으니까.


도망가고 싶을 때 유일한 피난처는 화장실이었다. 손님들은 예고 없이 들이닥치기 때문에 멀리 갈 수도 없었다. 급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 가게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지만 세상과 단절할 수 있는 공간으로 아주 적절했다. 사람들의 뜨거운 기운에서 떨어져 혼자만의 숨을 쉬고, 가끔 너무 서러울 때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었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고, 잔소리도 들리지 않는 나만의 동굴 같은 공간이 없었으면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의 작은 주방. 세팅 할 공간도 겨우 마련할 수 있고, 쉴 때는 딱 저 포즈로 앉아 있었다.




오픈하고 얼마 되지 않은 밤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문을 닫는 일요일 저녁에는 다음날 재료 준비를 미리 해놓아야 했다. 산책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걸어갔다가 이것저것 준비를 해놓고 집으로 다시 걸어오는 중... 아.. 아... 앗...? "혹시 그거 모밀 육수가 아니고 우동 육수 아니야?!?!?"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 모밀 육수와 우동 육수는 다르다. 우동육수는 단 맛이 아예 없지만, 모밀은 달달한 맛이 있다. 게다가 우동 육수는 물로 희석을 해서 써야 하는 원액이라 아주 진하다. 진하다는 건 그만큼 짠맛이 강한 것. 하지만 색감이 거의 같아서 눈으로 구분할 때는 헷갈리기 쉽다. 그런데 그 날 저녁 재료 준비를 하고 모밀 육수 냉장고에 육수를 채워 넣는다고 부었던 것이 아무래도 우동 육수인 것 같다는 깨달음이 온 것이다.


부랴부랴 뛰다시피 가게로 돌아가서 바로 모밀 육수 냉장고의 뚜껑을 열어 맛을 확인했다. 짠맛이 확 풍겨왔다. 아 이거... 우동 국물이 맞았다. 모밀에 우동 육수가 섞인 것이다. 휘젓지 않았기 때문에 아래 깊은 곳까지와는 아직 섞이지 않은 것 같아서 위쪽의 국물을 막 퍼냈다. 비록 액체였지만 얼음의 도움으로 고체의 성질을 잃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런 경우가 지금까지 두세 번 정도 있었다. 냄새를 맡거나 살짝 맛을 보고 부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때 꼭 그런 사고가 발생하곤 했다. 너무 바빠서 육수를 냉장고에 붓고 확인을 못하고 손님 테이블에 나갔는데, 모밀이 짜다는 피드백이 들어와서 맛을 봤더니 우동 육수가 섞여 엄청 짠 것을 발견 한 때도 있다. 그 상황을 떠올리면 몸서리가 쳐진다. 말도 안 되는 실수 아닌가! 


주방은 아무리 해도 완벽히 통제되지 않았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부딪히고, 그 사람들의 여러 손길이 지나가며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문제가 터지고, 그 문제를 틀어막으면 또 다른 곳에서 문제가 터지고. 이곳은 있어 보이는 셰프의 주방보다는 누가 적군인지 아군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운 싸움이 한창인 전쟁터에 가까웠다. 하얀 셔츠를 입고 앞치마를 곱게 두르고 요리하는 셰프의 이미지에 가닿는 일은 까마득하다 못해 불가능해 보였다. 처음 오픈할 때 큰 맘먹고 구입했던 W의 하얀 린넨 셔츠 4벌에는 빠짐없이 누런 기름이 여기저기 묻었다. 언젠간 입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구석에 넣어놨던 셔츠를 꺼내 빨아보니 시간이 지나며 기름 때는 마치 화석처럼 옷에 박힌 듯 지워지지 않았다. 셔츠를 떠나보내며 ... '전쟁통에 멋을 내려고 했구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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