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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PA Apr 03. 2024

말이 없는 곳에 다녀왔습니다

[노파의 글쓰기] 속세 탈출기



중요한 날인데 너무 개인적인 얘기만 늘어놓았네요.

오늘은 4.3 항쟁이 있던 날입니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


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어제는 속세 탈출을 꿈꾸며 선원에 다녀왔습니다.

언젠가 출가라는 것을 하게 된다면 이곳에서! 라며 점찍어둔 곳입니다.

 

강촌역에서 내려 하루에 네 번밖에 다니지 않은 마을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올라가면 강원도 적막강산에 무슨 폼페이 유적물 같은 단지가 하나 덩그러니 서 있는데, 그곳이 바로 제 출가 희망지입니다.

경내를 둘러보는데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곳 같았습니다. 어디서도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어쩌다 한둘 마주치는 사람들도 저를 피하기 바빴습니다.


그래도 여자분은 제 목례에 답례라도 해주며 저를 피했으나 남자분은 아예 제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 시선도 주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앞에서 백덤블링을 해볼까 하다가 참았습니다.

수행하는 사람들은 아기 사슴처럼 보호해줘야 합니다.


청정한 사람들의 무시와 무관심을 변태처럼 음미하며 저는 구석구석 절을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이 선원은 부처님 생전에 설법을 제일 많이 설한 곳인 ‘기원정사’를 재현한 곳이라 한국에 있는 다른 절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조계종 종단이긴 한데, 가르치는 것도 대승불교가 아니라 초기 불교입니다.


이곳 주지 스님이 수학과 박사까지 하다가 출가하신 분인데, 아마 우리나라에서 초기 불교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일 겁니다. 저도 이분이 강의한 법문 10년 치를 다 들어본 후에 되었다, 하며 이곳을 점찍게 된 겁니다.

다만, 원래 기원정사는 '제따왕자의 숲'에 세워졌는데, 여기는 나무가 없어 여름에 많이 더울 것 같았습니다. 돈이 모자랐나봅니다. 없으면 없는대로 살아야지요.


그러나 법당은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다른 얼씨구절씨구들 없이 불상만 세워놓은 간결함이 무척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이곳에는 압도적인 침묵이 있습니다.


말소리는커녕 새소리, 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에서 침묵은 마치 하나의 실체처럼 느껴집니다. 침묵이 마치 제 어깨와 머리 위로 무겁게 내려앉는 기분입니다.


차갑고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쓴 듯한 기분으로, 온몸으로 침묵을 체감하며, 저는 불상 앞에 조용히 방석을 깔고 앉았습니다.


그리고 뭘 하냐면, 명상을 합니다.

고수들은 참선을 하겠지만 저는 번뇌가 들끓는 중생인지라 머릿속에 꽉 차 있는 생각부터 지워야 합니다. 그래서 호흡 명상을 합니다.


코로 숨이 들어가고 나가는 것에 집중하는 일인데, 말이 쉽지 엄청나게 어렵습니다. 숨 한 번 들락날락하는 사이에 열 번의 딴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저는 한 시간 동안 피디를 열두 번을 죽였다 살렸고, 두 번째 한 시간 동안은 집에 가서 들기름 막국수를 만들어 먹을 생각을 했습니다.

살인과 식욕, 그게 제 내면의 핵심이었습니다.


제 정체를 확인한 저는 법당을 나와 휴게실로 들어갔습니다.

휴게실 테이블 위에 소금빵 두 개가 락앤락 통 안에 가지런히 담겨 있었습니다. 내면의 절반은 식욕으로 이뤄진 저는 조금 주저하며 그중 한 개를 훔쳐먹었습니다.


먹고 있는데 누가 들어와서 왜 맘대로 먹냐고 뭐라고 하면 벽을 타고 올라가 천장에 매달려 “넌 이 빵을 돌려받을 수 없어!” 하며 한입에 쑤셔 넣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절에서 빵 쪼가리 좀 먹는다고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으므로 저는 그저 가져온 초콜릿 세 개를 답례로 바구니에 넣어두었습니다.

내가 훔쳐먹은 소금빵과 내가 넣어둔 초콜릿

그리곤 물 한 잔을 마시며 이곳에 살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는데, 창 너머 전봇대에 매달린 현수막이 때맞춰 불어온 바람에 촤라락 펼쳐졌습니다.


“결사반대”


어쩐지 빵 도둑, 춘천 장발장은 꺼지라고 하는 것 같아 내심 섭섭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눈앞에서 마을버스가 뒤뚱뒤뚱 올라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 버스로 말할 것 같으면, 하루에 네 번밖에 다니지 않는 매우  귀한 것으로, 저것은 그중에서도 가장 귀한 막차였습니다.

버스가 일정보다 10분이나 빨리 나타난 겁니다.

아주 귀한 녀석입니다

저는 들고 있던 물컵을 보며 잠깐 고민했습니다.

이거 씻어놓고 가야 되는데... 근데 씻었다간 오늘 집에 못 들어가는데...

에이씨!


물컵을 테이블에 놔둔 채 냅다 튀어나와 신장개업 홍보 인형처럼 팔을 마구 흔들며 차 앞으로 뛰어들며 소리쳤습니다.

나도! 나도 태워달라고요!!

오늘 이 선원에서 들린 유일한 말소리였을 겁니다.


그리하여 저는 빵을 훔쳐 먹고 물컵은 안 씻은 인간이 되어 선원을 나왔습니다. 보통 절에 가면 사람이 더 좋아져서 나오는데 말입니다.


찝찝함을 떨칠 수 없던 저는 자본주의의 망령답게 빵값과 함께 사과의 메시지를 은행 계좌 거래 내역에 적어 보냈습니다.

“컵안치워서죄송합니다”


어떤 것은 경험해 보지 않아도 저절로 알아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저는 출가하면 보나마나 일주일도 안 되어 파계승이 되어 나올 겁니다. 그냥 가끔 왔다 갔다 하면서 빵이나 훔쳐 먹어야겠습니다.


ps. 수행자들이 기거하며 수행하는 곳이라 선원 이름은 말씀드리지 못하는 점 양해바랍니다.

참고로 저는 몇 년째 저 선원에 매달 정기적으로 후원을 해오고 있으므로 아주 외부인은 아닙니다. 자본주의의 망령답게, 돈으로 왔다 갔다 할 자격을 사둔 셈이지요. 그러므로 저만 다니겠습니다. 미안합니다.

무서운 홍보물


***

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3403070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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