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권의 책을 읽었다. 이문열 작가의 <사람의 아들>과 정보라 작가의 <밤이 오면 우리는>. ‘인간의 아들’과 ‘인간이 아닌 것의 딸’에 관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간의 아들’은 사실상 신이 되고픈 남자의 이야기이고, ‘인간이 아닌 것의 딸’은 인간적인 것을 갈망한 존재의 이야기다.
그러므로 정보라 작가의 책이 더 와닿았다. 내겐 언제나 인간이 되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으므로(또한 늘 인간도 되지 못한 자들이 신을 꿈꾸는 법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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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라 작가의 소설은 읽을 때마다 망치로 머리를 깡깡 부수어 놓는 기분이다. 좋은 책, 훌륭한 플롯의 개념을 마구 흔든다.
예를 들어 <저주 토끼> 같은 책은 읽고 나면 굉장히 불쾌한데, 그 감각이 굉장히 매력적이어서 읽고 난 후에도 한동안 책 내용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이번에 그가 <밤이 오면 우리는>으로 선사한 불쾌는, 내 어금니로 씹어먹는 듯한 폭력의 생생한 쾌감이다. 어머 잔인해! 하면서 입은 웃고 있는, 그런 불쾌한 쾌감.
폭력을 폭력으로 갚으면 안 된다는 말, 나도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폭력을 폭력으로 대갚음할 때의 상쾌함 또한 아주 잘 알고 있지요.
악인의 머리를, 목덜미를, 검치호의 송곳니 같은 이빨로 물어뜯을 때의 짜릿함! 이 소설은 그 불쾌한 짜릿함을 선사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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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는 흡혈인인 ‘나’와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로봇, 빌리가 나온다. 로봇이 인간을 말살하기 위해 안전장치를 가동한 시대, 그들은 인간 생존자를 구한다. 또한 로봇의 편에 서서 인간을 배신한 인간을 죽이는 일도 한다.
그러니깐, 인간이 아닌 것들이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을 죽이는 일을 하며 인간 정화 작업을 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로봇의 시대에 흡혈인은 어떻게 생겼나? 그게 아주 흥미진진하다.
“최초의 흡혈인은 ‘화장실의 미친 여자’였다고 한다. ... ‘화장실의 미친 여자’의 존재를 처음 알린 것은 남자들이었다. 더 구체적으로는 여자 화장실에 초소형 카메라를 설치해서 화장실 안을 엿보던 남자들이었다. 여자는 카메라 렌즈 앞에 남자의 죽은 머리와 부러진 뼈를 보란 듯이 들어 올렸다. ... 초소형 카메라를 사랑하던 남자들은 카메라와 기록을 사용해서 여자의 위치를 특정하고 정체를 알아내려 했다. 화장실로 몰려간 남자들은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 여자는 이곳저곳 화장실 초소형 카메라 렌즈에 무작위로 나타났고 언제나 누군가 남자를 죽여서 먹었다. ‘화장실의 미친 여자’는 한 명이었으니까, 모든 여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작가가 십대 시절, 화장실에서 변을 보는데 칸막이 아래 틈으로 남자의 손이 불쑥 뻗어 나와 바닥을 휘저은 일이 있었다고 했다. 밖에서는 남자의 친구들이 낄낄거리며 웃고 있고.
그때 작가는 세이버투스 같은 송곳니로 바닥을 더듬던 그 손을, 그 낄낄거리는 입들을, 전부 뚫어놓고 싶었을 것이다.
내게도 있고, 내 친구에게도 있는 그런 비슷한 경험들. 우리의 공포와 분노를 한데 모으면 폭력을 폭력으로 갚으면 안 된다는 말이 얼마나 맥빠지게 들리는지!
부처님, 저 같은 중생이 이토록 상쾌한 복수의 유혹을 어떻게 떨칠 수 있겠나이까!
그래서 그가 우리에게 정보라를 보내신 것이다. 괜한 허튼짓으로 피부 톤에도 안 맞는 수의 입지 말고 따뜻한 집에서 대리 희열이나 느끼라고.
그러므로 우리는 정보라의 소설을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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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인간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흡혈인과 로봇이 나온다는 설정에 그게 머여, 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인간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게 머여’ 같은 존재들이 필요하다.
흡혈인인 ‘나’에게 인간의 조건은 적절한 ‘냄새’와 ‘체액’이다.
“나는 울고 싶었다. 그러나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인간이 아니게 된 후로 나는 눈물을 흘리지 못했다. 나는 빌리가 질문했던 인간의 조건을 생각했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액체가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인간의 조건인지도 모른다. 눈물, 땀, 피, 혹은 진물이나 오물. 나에게는 없다. 피도 눈물도 땀도 체온도. 생명도. 여자는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는 살아 있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바람막이 재킷에서 내가 죽인 여자가 살아 있었을 때의 냄새, 피와 땀과 눈물과 생명의 냄새가 배어 나왔다. 나는 문 옆에 자리 잡고 섰다. 몸을 웅크리고 입술을 말아 올려 이를 드러냈다. 사냥할 시간이다. 전부 죽인다.”
냄새와 체액은 인간적일 뿐만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이기도 하다. 나는 맞은 편에서 뛰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숨을 참는다. 모르는 사람의 냄새를 맡고 싶지 않으니까.
반대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기면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숨을 크게 들이쉰다. 그 사람 냄새로 내 폐를 채우고 싶으므로. 내가 이런 변태 짓을 하는 것을 너는 막을 수 없지. 냄새는 그런 것이니깐.
체액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 내 얼굴에 침을 튀기면 극도의 불쾌를 느낀다. 독이다, 독! 그가 내게 독을 쐈다!
냄새와 체액. 그것 때문에 누군가는 더 싫어지고 누군가는 더 좋아지는, 지독하게 인간적이고 극단적으로 개인적인 것들.
그런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죄책감 넘치는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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