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학교의 마지막 퇴근을 했다. 재계약은 '사서교사'로 채용될 예정이라기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교원자격증은 없는 '2급 정사서'였다. 아마도 사서교사로 공고를 내도 지원자가 없는 경우에나 '사서'의 자리가 나올 것이다. 이 지역에는 교사가 많지는 않아서 아직 '사서'만으로도 자리는 있다고 했다. 한 해 경력도 쌓았으니 다른 학교에서의 새로운 출발을 기대하고 있다.
이틀 전 더 이상 출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학생들은 이제 어디 가서 떠드느냐, 무슨 낙으로 도서관에 오냐, 방학하면 가시지 왜 벌써 가냐 등 아쉬운 인사말을 해주었다. 선생님들은 북적이는 도서관이 보기 좋았다고, 행사 진행하느냐 수고 많으셨다는 인사를 해주셨다. 담당 선생님은 특히나 이것 저것 챙길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챙겨주며 고마움과 아쉬움을 전했다. 그 모든 마음들이 전해져서 떠나는 길이 외롭지 않았다.
번호를 따가는 친구들도 있었다. 어차피 몇 번이나 하겠나 싶어 몇몇은 알려주었다. 그런데 그중 마지막 방문자 두 명은 우리 집엘 찾아오겠다며 날짜까지 잡았다.
신앙의 방황을 하다 서른 무렵 만났던 교회 공동체가 있다. 그때에 리더를 맡았는데, 팀원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모여주었고,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주었고, 만남이 행복했다. 부족하게 준비해도 나머지 빈자리는 팀원들이 서로 도와 채워주었다. 봉사하고자 했는데, 섬김을 받는 시간이었다. 그 첫 리더의 경험이 삶의 전환점이 되어 주었고, 다음에도 리더의 역할을 감당하게 해 주었고, 그 길이 목회자에 대한 마음을 열어 사모의 길까지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반면에 회사에서의 리더의 경험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7~8명을 이끄는 작은 부서였지만 그들을 이끌만한 능력이 없었다. 글 쓰는 것은 좋아했지만, 그 외에 데이터를 수정하고 고치고 기준을 세우는 데에는 꼼꼼하지 못했고, 갈 길을 알지 못했다. 내가 후배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었고, 그런 나를 후배들도 신임하지 못했다. 결국 나는 휴직이라는 길로 도피했다.
퇴사를 하고 교육의 길로 오고 보니, 회사는 나에게 맞는 옷이 아니었음이 확실해졌다. 꼼꼼하지는 못하지만, 팀원들이 스스로 잘하는 것들을 발휘할 수 있도록, 서로 소통할 수 있도록, 시간과 장소를 마련해 주고 독려해 주는 일, 책과 글쓰기로 삶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은 심장이 활기차게 뛰었다. 내가 즐거우니 관계자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공동체의 첫 리더의 경험처럼, 학교 도서관의 첫 경험이 행복하게 저장되었다. 나의 중학교 시절에도 주말이며, 휴일이며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다니던 선생님이 계셨다. 나는 한 번도 함께하진 못했지만, 그 시절의 추억이 학창 시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때로 남아있다. 나도 아이들에게 그런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
나를 찾는다던 아이들은 공부를 잘하는 아이도, 모범생도 아니다. 그중 한 명은 학교도 잘 안 나오는 아이다. 담당 선생님은 도서관에 출근하는 아이를 의아해했다. 아이의 부모님은 이혼하셨고 그로 인해 방황을 좀 하는 모양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그저 특이하게만 보던 나의 시선이, 그녀에게도 하고 싶은 일들이 많다는 것을,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누구보다 크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게 바뀌었다. 그리고 학교의 누군가가, 그것이 나라면, 좋은 어른이 되어주어야지 다짐하게 되었다.
방학이다.
여덟 살 난 아들과 도서관을 다니며 관심 가는 책은 닥치는 대로 읽어내고, 기록하고, 나의 글을 써봐야지 다짐해 본다. 도서관을 넘어 글을 쓰는 행복한 시간이 오래동안 지속될 수 있도록. 그 행복한 시간을 다른 이에게도 전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