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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박씨 May 14. 2024

[1-2] 순례주택/유은실 소설

염치 있는 인간이 되려면

학생들이 한창 많이 빌려가던 책들, 청소년 소설 베스트를 차례차례 읽고 있다. 청소년 소설을 읽기 시작한 이유는 첫째는 재미있었고, 둘째는 도서관에 오는 친구들과 책추천 혹은 책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고, 셋째는 나의 불우했던 청소년 시절을 되짚어 보고 위로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청소년 문제가 과연 그때뿐인 문제일까? 관계, 소속, 가족, 진로, 우정, 사랑…그때의 고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게 인생사인가 싶다. 어릴 때만큼 세계가 좁지는 않아서 한 관계가 틀어져도 청소년 시절만큼의 타격은 없지만, 여전히 그때의 문제들이 씨실과 날실로 엮여 살아가는 중이다. 그래서 청소년 소설이 아이들만의 소설이라고 느껴지진 않는다. 


『순례주택』은 작년 중학교 3학년 친구들이 많이 빌려가던 책이었다. 작가의 이름도 내 이름과 같아서 괜히 더 정감 가고, 언젠가 읽어봐야지 했다. 부자이지만 철없는 가족이 가난하지만 내면이 단단한 가족들과 함께 하는 이야기(실제로 가난하진 않다. 행색이 가난할 뿐. 드라마와 소설 모두 그렇다.)로 따뜻한 웃음을 주었던 드라마「눈물의 여왕」도 떠오르면서, 염치를 아는 진정한 어른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되었다.


주인공 16세 수림이는 할아버지의 여자친구 순례 씨의 손에 자랐다. 그 덕에 수림이는 공부는 썩 잘하진 못해도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법을 일찍부터 터득했다. 반면, 수림이의 엄마 아빠는 아끼면서 제 손으로 돈 벌 궁리는 할 줄 모르는 철부지 부모다. 수림의 언니도 그런 부모 밑에서 자라 공부만 잘하면 이 세상 잘 사는 줄로 착각하며 사는 인물이다. 수림은 공부를 언니만큼 못한다는 이유로 제 가족에게선 모자란 사람이다. 그래서 수림이는 순례 씨와 함께 있는 게 가장 마음 편하다. 그러던 중 할아버지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돌아가시면서 수림이네 부모님은 빚더미에 앉게 되고, 집도 절도 없는 처지가 되어 버리는데……. 


수림의 부모님은 빌라촌과 아파트촌으로 나뉘는 동네의 아파트촌에 살고 있었고, 커뮤니티에 빌라촌과 섞이지 말라는 둥 상처 주는 말로 뭇매를 맞으면서까지 차별의식으로 가득 찬 인물이다. 사실은 제 힘으로는 살아본 적 없는, 시댁과 친정 아빠의 돈으로 얹혀사는 실정이었지만, 그들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자각하지 못한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고모들이 등 돌리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들의 힘으로 살 궁리를 하기 시작하는데, '풋가난'을 경험한 수림이의 부모는 수림이가 없으면 이 난관을 헤쳐나가기 힘들어 보인다.


수림이를 지탱해 주고, 수림이네 가족을 구원해 주는 인물이 '순례주택'의 주인 순례 씨다. 수림이네 부모님과는 다르게 '진짜 어른'의 면모를 자랑한다. 건물주이지만 절대로 필요 이상의 집값을 받지 않고, 세를 올리지도 않으며, 죽어서도 못 쓸 돈을 모으는 일도 없다. 잔고가 1000만 원이 되기 전에 모든 재산을 나누는 게 한 해 정산의 날이다.  또한 사람과 사람을 나누어 생각하는 일을 병적으로 싫어하며, 그래서 자신의 재산도 '국경 없는 사회'에 넘기기로 약속한 지 오래다. 또한 그렇게 이 세상을 '순례자'처럼 살다가는 순례 씨다.


수림의 엄마는 '솔직히'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엄마"
"왜?"
"꼭 솔직하게 말해야 돼?"
"뭐?"
"어른이 왜 솔직해? 마음을 좀 숨겨. (하략)

한숨이 나왔다. 나는 '엄마가 준 상처' 얘길 하는데, 엄마는 '자기가 받은 상처'를 얘기했다.
-127p


반면, 순례 씨는 감사와 감탄을 하려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순례 씨는 '감사'라는 말을 잘한다. 1군들에게선 거의 들은 적이 없는 말이다. 순례 씨가 좋아하는 유명한 말-관광객은 요구하고, 순례자는 감사한다-가 떠올랐다. 나도 순례자가 되고 싶다. 순례자가 되지 못하더라도, 내 인생에 관강객은 되고 싶지 않다. 무슨 일이 있어도. -100p


수림의 부모는 밑에서부터 하나씩 아끼고 노력하는 법을 모른다. 자신의 생각에 어긋나는 일에는 '솔직히'라는 말로 타인을 상처 입힌다. 힘들이지 않고 이것저것 달라고 '요구'만 하는 7-8세 어린아이에서 자라지 못한 어른이다. 세상에는 '어린 어른'들이 많을까 순례 씨 같은 어른이 많을까? 나는 어디에 속해 있을까? 


수림이가 부모를 반면교사 삼았듯, 나 역시도 어린 어른의 모습이었던 아빠를 보며 '저렇게는 살지 말아야지' 다잡았던 기억이 난다. 부잣집 둘째 아들로 자라 할아버지 재산을 다 탕진하고 빈털터리가 된 후에야 조금씩 정신 차렸던 아빠, 그 모든 것을 지켜보며 묵언수행했던 엄마까지, 그 모든 게 나에겐 산 교육이었다.


아직, 나 역시도 여전히 자라는 중이다. 아이에서 청소년으로, 청소년에서 청년으로, 그리고 중년으로. 물리학적 숫자를 넘어 정신과 마음에 이르기까지 계속 나아가고 있기에 감사하다. 내 상처에만 골골대던 때에서 벗어나, 타인의 아픔도 조금씩 보이는 '풋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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