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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la Apr 11. 2016

허들 넘기

긴 따뜻함을 안고 날아오르던 그 순간


#26 허들 넘기: 
긴 따뜻함을 안고 날아오르던 그 순간



‘우’도 없었다. 

늘 ‘수’만 받았다. 아빠는 옆집에까지 내 성적표를 들고 가서 팔불출처럼 자랑을 했다. 함박웃음이 가득한 아빠 얼굴을 보면 내 기분도 우쭐했다. 줄곧 학급 임원을 맡고, 사람들로부터 공부 잘 한다 소리를 듣는 건 대체로 유쾌한 일이었다. 그런 환호 속에 때로는 질시도 섞여있다는 것을 알아채기 전까지는 말이다.


따돌림을 당한 적이 있다. 맞춤법을 자주 틀리는 친구에게 지적을 해줬던 게 화근이었다. 친구의 일기장에 선생님의 빨간 줄이 가득했다. 맞춤법을 틀릴 때 내가 옆에서 가르쳐주면 그 친구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어울리는 무리의 대장 노릇을 하던 친구인지라, 자존심부터 다친 모양이었다. 복수가 시작됐다. 나만 빼고 아이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해 함께 놀거나, 내가 하는 말마다 토를 달았다. 급기야 친구는 단도직입적으로 내게 말했다. “난 네가 싫어. 잘난 척해서 재수 없어. 저 잘났다고 으스대기는.”






으스대려고 그런 게 아닌데 억울했다. 게다가 내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내 약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체육에 젬병이었다. 책상을 벗어나면 힘을 못 썼다. 체육은 내게 버티는 시간이었다. 안 되는 몸을 애써 굴려 실기시험에서 B나 C를 받으면 나머지는 필기시험 점수로 만회하곤 했다. 물론 그 방법에는 한계가 있었다. 초대형 악재가 닥쳐온 것이다. 바로 허들이었다.


처음엔 잘 뛰어넘었다. 내 몸이 말을 들을 때도 있네, 하며 모처럼 신이 났다. 그러던 중 일이 터졌다. 허들에 걸려 넘어져 입가에서 피가 나는 친구를 목격한 것이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양호실로 가는 친구를 보니 덜컥 겁이 났다. 운동장에 세워진 허들이 갑자기 공포로 다가왔다. 그때부터 난 허들을 넘지 못했다. 


열심히 내달려 허들 앞에 다다르기만 하면 내 몸은 정지 버튼을 누른 듯 끼익 멈춰버렸다. 실기시험 날짜는 다가오고, 나처럼 허들을 넘지 못하던 친구들은 하나 둘씩 두려움을 극복하며 곁을 떠나갔다. 결국 시험에서 실격을 받은 사람은 나 혼자였다. B도 C도 아닌 F. 허들 이까짓 게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넘느냐 마느냐로 점수를 매기나 싶어 속상했다. 점수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내 성적표에 남겨질 오점이 뼈아팠다.






별안간 선생님의 말씀이 귀에 날아들었다. “너를 포기 안 하겠다”고. 선생님은 체육실 열쇠를 내 손에 쥐어 주시더니, 시간 날 때 허들을 꺼내서 연습하라고 하셨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그 순간 선생님은 냉혹한 채점자가 아니었다. 단 한 명의 학생도 흘리지 않고 끌어안아 가려는 스승의 모습을 내게 보여주고 계셨다. 아니,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계셨다. 나와 똑같이 자기 성적 생각만 하고 있었을 반 친구들도 그제야 비로소 낙오자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파이팅!”, “할 수 있어!”, “힘내!” 같은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공부 잘한다고 들었던 칭송과는 확연히 다른 힘이 느껴지는 말들이었다. 칭찬에는 잠깐의 짜릿함이 있었지만 격려에는 긴 따뜻함이 있었다. 칭송 옆엔 질시가 있었지만, 격려 옆엔 응원이 있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내 등과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들의 온기를 느끼면서.


며칠간의 연습 끝에, 어느 쉬는 시간 나는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혼자서 운동장으로 나섰다. 선생님께서는 허들을 꺼내 놓고 기다리고 계셨고, 나는 출발선에 섰다. 고개를 드니 우리 반 교실이 보였다. 창문마다 얼굴 내민 아이들이 손을 흔들며 내게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심호흡 한번,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허들을 노려본다. 출발 신호와 함께 나는 달린다. 

아이들의 함성 소리를 타고 두둥실 내 몸이 날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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