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그것을 늘 ‘물국수’라 불렀다
책상을 마주대고 앉아 우리는 도시락을 꺼냈다. 잘게 썬 주황 당근과 초록 대파가 박혀 알록달록 고운 달걀말이는 다현이네 엄마 솜씨다. 송이가 꺼낸 도시락에선 푸짐한 불고기와 돈가스가 나왔다. 젓가락들이 부지런히 오갔지만, 내 반찬통으로 오는 손길은 드물었다. 그 안에는 엄마가 싸준 멸치볶음과 감자조림이 담겨 있었다.
엄마의 반찬은 인기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엄마는 음식 솜씨나 센스가 좋은 편이 못 되었다. 다현 엄마처럼 먹음직스럽게 모양을 내지도, 송이 엄마처럼 눈치 빠르게 아이들이 좋아할 반찬을 싸주지도 못했다. 사실 그건 당연했다. 강원도 시골 출신인 엄마가 보고 먹고 자란 음식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았겠는가. 소박하고 투박한 음식을 먹으며 자랐을 엄마에게 그럴싸하고 화려한 음식을 기대하는 건 난센스였다.
천덕꾸러기 셋째 딸이었던 내게도 한 가지 타고난 복은 있었다. 나는 밥을 복스럽게 먹을 줄 알았다. 맛도 모양도 심심한 엄마 밥상 앞에서 큰언니는 편식하고 작은언니는 과자로 배를 채우고 동생은 투정했지만, 나만은 뭐든 잘 먹었다. 평상시 내게 큰 관심 없었던 부모님 두 분은 밥상 앞에만 앉았다 하면 돌연 나의 열렬한 신도가 되셨다. 밥알 하나 안 흘리고서 어쩜 저렇게 손도 야무지게 잘 먹냐며 찬양하셨고, 너희들도 이렇게 좀 먹으라며 언니들과 동생을 나무라셨다.
훈계의 효력은 길지 않았다. 특히 엄마가 국수를 끓이는 날이면 더 그랬다. 하루에 세 번씩 여섯 식구 먹을 밥을 차려야 했던 엄마다. 얼마나 고단하셨을까. 과일을 사도 한 궤짝씩 사다 먹어야 하는 대가족이었다. 가진 건 맨주먹뿐인 아빠 혼자 버는 돈으로 매끼 굶지 않고 먹을 수 있었던 게 어찌 보면 기적이었다. 어릴 땐 잘 몰랐다. 쌀밥 대신 국수로 배를 채워야했던 날도 있었다는 것을. 내겐 그저 간만에 좋아하는 국수를 먹는 날이었고, 언니들과 동생에게는 맛없는 국수를 먹으려니 투정을 안 할 수가 없는 날이었다.
잔치국수라 부르기엔 단출했다. 달걀지단이나 당근 채, 고기 같은 것은 올라가지 않았다. 사투리인지 잔치라는 수식어가 부끄러워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엄마는 그것을 늘 ‘물국수’라 불렀다. 재료의 가짓수는 한 손만으로도 충분히 헤아린다. 멸치와 다시마를 우려 국물을 내고, 국간장으로 간을 하고, 어슷 썬 대파와 달걀을 푼 뒤 소면에 부어서 내면 끝이었다. 나는 “국수다 국수”하고 춤을 추며 밥상에 앉아 누구보다도 빨리 먹어치운 뒤 “한 그릇 더”를 외쳤다.
맛있게 먹었던 기억 뿐이라 국수는 그저 내게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였을 따름이다. 다른 큰 의미는 없었고 가장 좋아하거나 특별하게 여기는 음식도 아니었다. 그걸 각별하게 여기고 있었던 건 오히려 엄마였다. 결혼을 하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 때다. 미리 연락을 드린 후에 친정을 찾았는데, 엄마가 국수를 끓이고 계셨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풍겨온 그 국물의 포근한 냄새에 나는 늘 그랬듯 “국수다 국수”했다. 부리나케 신발을 벗고 들어가 국수부터 한 그릇 먹었다. 후루룩거리며 국수 가락 빨아올리기 바쁜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엄마가 나직이 말했다. 국수 이까짓 게 뭐라고, 끓일 때마다 네 생각이 그렇게 난다고.
세상이 좋아져서 인터넷만 있으면 요리 선생님이 필요 없다. 결혼 전까지는 제 손으로 밥할 줄도 몰랐던 내가 이제는 인터넷 선생님 덕분에 오 대륙을 넘나드는 요리를 한다. 그렇게 배운 게 수도 없이 많지만, 엄마의 물국수 만큼은 잘 되지 않는다. 그 맑고 포근한 맛이 안 난다. 무슨 재료 2Ts, 무슨 재료 300ml 하는 식으로 배울 수 있는 음식이 아니다. 자식을 낳고 엄마 마음이라는 것을 가져보아야 제 맛이 날까? 그걸로도 모자랄 것 같다. 엄마가 감내해야 했을 삶의 무게를 감히 짐작할 수 없다. 다만 복스럽게 국수를 먹던 어린 날의 나를 보며, 엄마는 작은 눈금 하나 정도 그 무게를 덜었을까 생각해볼 뿐이다.
어릴 적 얘기를 하다보면, 나는 웃는데 엄마는 눈물을 흘릴 때가 가끔 있다. 엄마는 너희들에게 못 해준 생각이 들어 자꾸 눈물이 난다고 하셨다. 물국수도 그랬다. 내게는 그냥 좋아하는 음식일 뿐이었는데, 엄마는 못 먹이고 못 해준 미안함을 더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주변의 도움도 없이 혼자 네 아이를 키워야 했던 엄마의 고생을 내가 어떻게 다 알 수 있을까. 아이 하나 낳기도 겁나서 생각 않고 있는 나로서는 더욱 더 그렇다. 용돈을 드려도 한사코 안 받으시는 우리 엄마. 받고 싶은 걸 물어도 그런 거 없다고, 엄마는 그냥 다 주고만 싶다고 늘 말하는 우리 엄마. 그런 마음이면서도 항상 못 해줘서 미안한 것부터 생각하시는 우리 엄마. 자식이 부모 생각하는 건 죽었다 깨어나도 부모가 자식 생각하는 만큼을 못 따라간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내가 끓이는 국수에선 엄마 맛이 안 나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