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면 애국자, 안 하면 이기주의자?
#32 일탈도 유난도 아닌:
하면 애국자, 안 하면 이기주의자?
헤드헌터는 그 점을 강조했다. 남성 중심의 서열 문화가 없는, 합리적인 회사라는 것이다. 호기심이 동했다. 여성 임원과 일해 본 경험이 없는 내게는 더욱 그랬다. 이직 생각이 딱히 없다 해도, 면접 한번 봐서 나쁠 것 있겠나 싶었다. 약간의 기대감을 가지고 경력직 면접 제안에 응했다.
지사장은 밝은 웃음으로 나를 맞았다. 내 복장과 경력에 대한 칭찬부터 인사말로 건네 왔다.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미묘해지기 시작한 건 그녀의 눈길이 내 이력서의 어느 한 지점, 미혼이라 기재된 부분에 멈췄을 때였다. “미혼? 남자친구는 없어요?” 나는 결혼을 앞뒀으나 출산 생각은 없고, 예비 신랑 또한 같은 마음이라 답했다. 그녀는 내 소신에 ‘우려’도 아닌 ‘반대’를 표했다. 여자라면 아이는 꼭 낳아야 한다고 단언했다. 전통적 성 역할을 너무 무시하려 들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접대에 있어서도 여자가 남자한테 술 좀 따라줄 수 있다는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고 했다. 확신 어린 그녀의 표정에서 망설임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저렇게 임원이 되기까지 저 분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을까. 만약 큰 기대를 품고 면접에 왔다면 지금 내 기분이 어땠을지에 대해서도.
나는 통제하기 쉬운 사람으로 살아왔다. 땡볕의 학교 운동장, 쓰러져나가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나는 곧게 차렷 자세를 지키며 교장의 긴 훈화를 견뎠다.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과 규범에 꽤나 투철했고, 스스로 그게 자부심이라 여겼던 시기도 꽤 길었다. 그래서일까. 어떤 대단한 일탈의 기억이 없다. 술도, 담배도, 떠들썩한 유흥과 왁자한 흐트러짐도 체질에 별로 맞지 않았다. 남들 대학 갈 때 나도 대학에 들어갔고, 다들 취업 준비할 때 나도 그것에 매달렸다. 유난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살았다. ‘일반’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 본 적이 없다.
통념과 다른 길을 처음 생각한 건 소위 말하는 ‘결혼적령기’ 때부터였다. 사랑의 귀결이 왜 꼭 결혼이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법적으로 나와 누군가를 묶기 위해, 그런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치러야만 하는 막대한 비용이 납득되지 않았다. 말년에 쓸쓸하거나 초라하지 않으려면, 후회하지 않으려면 결혼을 해야 한다는 주변의 겁박 같은 설득은 내가 결혼을 못마땅하게 여기도록 만든 가장 큰 이유였다. 결혼의 가치가 두 남녀의 화합과 맹세에 있기보다 마치 보험과도 같은 노후대책적 필요에 있는 것이라면 그야말로 타산적이고 속물적이지 않은가.
남자친구를 설득하는 데 실패해 결국 결혼을 택했지만, 출산과 육아에 대해서도 내 생각은 부정적이다. 나는 인생이 정해진 관문을 통과해나가는 과정의 연속만은 아니라고 믿는다. 사랑의 끝이 언제나 결혼일 수 없듯, 결혼의 다음 관문이 꼭 출산일 필요도 없다. 어려서부터 친척 동생들과 조카들을 졸졸 몰고 다녔을 정도로 아이들을 좋아했던 나다. 그런 만큼 내 결정은 출산 기피라기보다 출산 포기에 가깝다. 현재의 40대가 역사상 가장 행복한 세대가 될 것이라는 어느 학자의 말을 들었다. 발달한 기술 문명의 편의는 최대한 누리면서, 기계가 세상을 지배하기 전에 은퇴할 수 있는 마지막 세대라는 것이다. 베이비붐 세대는 복권에 당첨된 세대라 불린다. 성장의 과실을 한껏 따먹은 베이비부머의 세상과 앞으로 펼쳐질 세상은 다르다. 자본주의의 왕성한 식욕이 미래세대 몫의 양식까지 미리 먹어치워 버렸다. 가파른 상승의 축제는 끝났다. 어떻게 덜 아프게 곤두박질칠지를 고민해야 하는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
여성의 자궁은 그 여성 본인의 것이다. 그것을 여러 사람은 물론이고 국가까지도 개입할 자격 있는 공동의 소유물인 것처럼 여기지만 실상 출산의 고통과 육아의 고단함은 개입한 모두가 똑같이 나눠 짊어져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결정의 자격을 지닌 주체로서 아이를 낳지 않겠다 말하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결정의 권한 바깥에 있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들을 잔소리를 각오해야만 한다. 아이를 낳는 것도, 낳지 않는 것도 다만 선택일 뿐이다. 어느 한쪽의 선택만 일탈이나 유난으로 받아들여질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