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으로 내 밥 차리기
#31 요리 사진, 왜 올리냐고요?:
내 손으로 내 밥 차리기
그런데도 나는 꿋꿋이 올린다. 내가 만든 음식을 사진으로 남기고, 일기처럼 SNS에 기록한다. 결혼을 하고 내 살림을 갖게 되면서부터 시작했으니 이제 3년이 조금 지났다.
학창 시절, 교실 뒤편엔 40~50명 안팎 되는 학급 아이들의 스케치북이 출석번호 순서대로 나란히 걸려있었다. 매주 한 번쯤 있는 미술 시간에 그린 그림들이다. 내 그림 실력은 그럭저럭, 왔다 갔다 하는 수준이었던 것 같다. 어떤 때는 조금 마음에 드는 그림이, 어떤 때는 뒤에 걸어 남들에게 보이기 다소 멋쩍은 그림이 나오곤 했다. 잘 그렸어도 형편없어도 그림은 어김없이 뒤에 걸렸다. 생각해보면 아이들의 그림이 하나같이 대단하게 잘 그린 것들이라서 나란히 걸어뒀을 리는 없다. 의도가 있었다면 이런 것 아니었을까. 실력이야 어떻든 각자 시간과 노력을 들여 만들어낸 것이니 그런 창조의 결과물을 오며 가며 계속 보고 그 시간과 노력, 그리고 성취에 대한 뿌듯함을 스스로 느껴보라는.
직접 만든 요리를 곧바로 먹어치우지 않고 먼저 사진을 찍은 뒤 SNS에 모아두는 건 내 경우 그런 기분이다. 교실 뒤에 걸린 스케치북을 보는 기분. 미술 시간마다 내 손에서 나온 때론 잘 그렸고 때론 못 그린 그림들을 한 장 한 장 바라보는 기분. 그러니 솜씨가 훌륭하다고 우쭐하려는 것도, 내가 이렇게 잘 먹고 산다고 뽐내려는 것도 아니다. 남들에게 자랑이나 하려는 거드름이었다면 언제고 뜨끔한 마음이 들어서라도 진작 그만뒀을 테니.
우리가 먹기만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살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일 중 먹는 행위를 빼놓을 수는 없다. 따지고 보니 결혼 전까지의 나는 이 분야에 있어 매우 수동적이었다. 누군가 차려놓은 음식을 수저로 떠먹는 것 정도가 먹는 행위의 대부분이었다. 살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먹는 일’의 범주가 내 사고방식 속에서는 그렇게 좁았다. 내 삶을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척은 혼자 다 하면서 내 손으로 내가 먹을 밥상 한 번 제대로 차려본 적이 없었다. 엄마가 차려주는 밥, 또는 돈 내면 누군가가 차려주는 밥. 삶의 동력이 되는 에너지원을 늘 그렇게 남의 손을 빌려다가 채워온 것이다.
불현듯 부끄러웠다. 내 입에 들어갈 음식 하나 스스로 차려먹을 줄 모르고 이제껏 살아왔다니. 성숙한 어른의 모습은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았다. 먹는 일을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부터 나는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고민하고 배우고 터득하고 실행에 옮긴 행위의 결과물들이 사진으로 차곡차곡 남았다.
집안일 같은 건 아무래도 소질 없고 관심 없다고만 여겼는데, 막상 요리를 직접 해보니 의외의 재미가 있었다. 흥미진진한 공작 시간 같았다고나 할까. 학생 신분을 벗어난 이후 좀처럼 가져본 적 없는 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창조라는 게 뭐 별 건가 싶어졌다. 거창하지 않아도 이렇게 식재료들을 손질하고 조리해 한 접시에 담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게 다 창조고 창작 아니겠는가. 맛과 모양, 색과 영양가의 조합 등을 고려하며 이렇게 저렇게 만들다 보면 알록달록 그림 한 장 같은 창작물이 식탁 위에 놓였다. 내 손에서 이런 창작품이 나왔다는 기쁨을 느끼고 그것을 사진으로 남겨두는 게 무척 즐거웠다.
내 손으로 나를 먹이는 일의 긍정적 효과는 그뿐이 아니다. 이전에는 미처 몰랐던 즐거움에 하나씩 눈뜨게 되었다. 우선 기복 없는 몸을 유지하게 된 것이 첫째다.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싶은 양만큼 스스로 조절하며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재수 시절, 이상한 허기에 시달려 밤마다 밥솥을 열어보고 라면을 끓이곤 했다. 먹고 싶었던 음식도 아닌 것을 밤늦은 시각에 목으로 꾸역꾸역 넘겼다. 점심 저녁 두 끼, 다 식어 차갑고 맛없는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는 매일이었다. 배가 부른 것과 별개로 심리적 만족감은 바닥이었다. 그러니 허한 마음을 자꾸 엉뚱한 음식으로 채우려 한 것이다. 먹는 일을 함부로 여기면 몸이 가끔 이런 일탈을 벌이기도 한다는 것을 이후에도 종종 체험했다. 이제 하루에 최소 한 번은 내가 먹을 음식을 직접 차린다.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 구미가 당기는 음식을 먹고 싶은 만큼만 해 먹는다. 먹는 일에 성의를 들이자 몸이 달라졌다. 몸무게가 크게 늘거나 주는 일도, 밤늦은 시각 이상한 허기에 시달리는 일도 없어졌다.
식재료에 대한 이해가 늘면서 미각이 보다 섬세해진 것도 큰 재미다. 국물 요리에 파가 왜 들어가는지 더는 못마땅하거나 궁금하지 않다. 설탕의 단맛만 달게 느끼는 게 아니라, 당근이나 양파 같은 뿌리채소가 갖는 은근한 단맛의 묘미를 느끼고 요리에 활용할 줄 알게 되었다. 이런 채소를 충분히 볶거나 끓이면 설탕을 많이 쓰지 않아도 음식에 기분 좋은 단맛과 풍미를 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꺼리는 고수나 셀러리처럼 향이 강한 재료는 사실 느끼한 국이나 탕을 산뜻하게 탈바꿈시켜주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 괜한 편견 탓으로 즐겨 먹지 않았던 식재료에 대한 오해를 풀자 식생활이 보다 다채로워지고 풍성해졌다. 알고 먹는 재미다.
내가 나를 먹이는 일이 주는 즐거움이 이렇게 많지만, 그중 무엇보다도 값진 건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더 넉넉해진 것 아닐까 싶다. 나 한 사람의 입에 들어갈 음식을 차리는 일보다 나와 함께 먹을 사람 몫까지 차리는 일이 항상 더 뿌듯하다. 함께 먹을 요리를 할 때 더 성의와 공을 들이게 되고, 음식은 혼자 먹을 때보다 누군가와 마주 보고 먹을 때 훨씬 더 맛이 있다. 대접하는 기쁨이 뭔지 깨닫게 되었고 마음과 정성을 나누는 만큼 상대방과 돈독해짐을 느꼈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만든 음식 또한 보다 감사하며 먹을 줄 알게 되었다. 당연한 줄로만 알고 먹었던 엄마의 수많은 음식들을 떠올려봤다.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수고로움은 생각도 못한 채 그간 나는 얼마나 감사함 없이 그 음식들을 먹었던가. 손쉬운 몇 마디로 한심한 반찬 투정을 하거나 음식 타박을 하지는 않았는지 새삼 되돌아보게 되었다. 요리하는 시간은 참으로 나를 위하는 시간이자 더불어 남을 위할 줄 알게 된 시간이었다.
내가 나를 책임지는 자세, 보다 어른으로 자라는 시간, 더욱 넉넉해지고 넓어지는 기회. 내가 나를 먹이는 일이 가져다준 선물들이다. 이 좋은 일을 아내, 엄마, 여자들의 전유물로만 여기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면 조금 마음가짐을 바꿔보면 어떨까. 교실 뒤에 가득 걸려있던 스케치북들처럼, SNS에 저마다 직접 만든 요리 사진들이 가득 걸려있으면 참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디서 무엇을 소비했는지 뽐내기에만 바쁜 요즘 사람들. 이런 소소한 생산의 시간을 서로 공유하는 것에도 조금은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 그리고 나직하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