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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 Mar 08. 2017

그린티라떼 (녹차라떼)

어른이 되고 싶었던 소녀이야기

     

      비가 오는 날이면 그린티라떼(혹은 말차라떼)의 유혹을 떨칠 수가 없다.

     

     여름엔 냉장고에서 갓 꺼낸 우유로 만든 시원한 그린티라떼를, 겨울에는 우유를 덥히며 생긴 우유 거품 가득한 그린티라떼를, 받아 들 때에면 나는, 신난 모습을 감출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는 나만의 방법으로 그린티라떼를 '감상'하기 시작한다. 녹차가루가 충분히 들어간 날에는 진한 녹색, 적당히 들어간 날에는 부드러운 녹색, 조금 덜 들어간 날에는 파스텔 녹색. 게다가 시원한 그린티라떼를 테이크 아웃하는 날에는 녹차가루가 우유에 사르르 녹아들면서 만들어내는 그라데이션까지 볼 수 있다. 마치 녹차가루들이 제각기 춤을 추는 것 같다.


우유 안에서 춤추는 녹차가루들


     눈의 감상이 끝이 나면 혀의 감상이 시작된다. 대게의 카페에서 사용하는 그린티라떼에는 달달함을 강조하기 위해 설탕이나 시럽이 조금 더 들어가는데 굳이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말차가루도 우유와 섞이게 되면 고소한 달달함이 배어 나온다. 그렇게 달달한 첫맛이 어느 정도 가시고 나면 말차(녹차가루) 고유의 쌉싸름한 맛이 남게 된다. 컵을 빠져나온 녹차가루들이 이번에는 내 혀에서 춤을 추고 있다.


     내게 커피는 어른들이 마시는 쓴 음료수였다. 쓰디쓴 커피를 자연스럽게 마시는 가족이나 선생님들을 보면서 '아, 어른이 되면 저 커피가 달아지는구나!'하고 막연히 생각했다. 세월이 흘러 머리가 조금 더 컸을 때 카페에서 자연스럽게 원하는 제조방법과 커피콩 생산지를 언급하며 커피를 주문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이미 '어른의 입맛'을 가진 모습을 부러워했다는 건 아무도 몰랐겠지.


     그린티라떼는 커피를 마시지 않는 내가 카페에서 허리를 곧이 세우며 주문할 수 있는 음료였다. 쓴 커피를 달달한 척 마시기는 싫었고, 왠지 모르게 '어린이의 입맛'인 듯한 주스나 소다는 자존심이 상해 주문하기 싫어 선택한 것이 그린티라떼였다. 뭔지는 모르지만 -라떼라는 접미사가 붙었으니 '어른의' 카페라떼와는 비슷하지만 쓴 맛은 없고 고소하며 달달한 맛만 남아있는 어른인 척할 수 있는 음료를 찾은 것이다. 그때의 그 기쁨이란.


     그린티라떼의 감추어진 쌉싸름한 맛을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달달한 그 맛이 좋아 목 넘김을 느끼기도 전에 새 모금을 들이켰고 그러다 보면 주문한 음료는 나오자마자 사라지기 일쑤였다. (기다리는 데에 5분 마시는 데에 3분) 비가 오던 어느 날, 비를 맞긴 싫어 창가에 서서 그린티라떼를 마시는데 원래 내가 알고 있던 그 맛과는 다른 맛이 느껴졌다. 계속 그린티라떼의 '맛'인 줄 알았던 것이 첫 모금에서만 슬쩍 느껴지고 희미하게 또 다른 뒷 맛이 느껴졌다. 처음이었다. 비가 와서 내 마음의 맛이 그래서였을까? 달달한 첫맛 뒤에 빼꼼 느껴지는 쌉쌀한 (씁쓸한 맛이 아니다!) 그 맛이 싫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그 맛이 새로워 한 모금을 조금씩 마시고 조금 기다렸다가 또 한 모금 마시고, 그렇게 그 시간을 보냈다.


     2016년은 나에게 잔인한 한 해였다.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원하던 대로 된 것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일들이 너무나 큼지막해 상처를 많이 입은 한 해였다. 그린티라떼의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맛을 계속 느끼다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까 싶어 수없이 많은 그린티라떼를 마셨다. 어른처럼 시간을 보내며 어른인 척 생각하다 보면 그 이유를 어른들처럼 절로 알게 될 거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문득 쓰디쓴 커피를 달콤한 사탕처럼 맛있게 마시는 듯 보이던 어른들이 떠올랐다. 내게 '쓰다'는 부정적이고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맛이었는데 그 맛은 어른들도 똑같이 느끼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걸 마시던 어른들에게는 그 '쓰다'도 즐길 수 있는 맛의 한 부분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찾았던 그린티라떼의 쌉쌀한 맛처럼 커피 고유의 맛을 찾아낸 것은 아니었을까? 알고 있던 맛만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맛을, 좋아하지 않던 맛 조차도 즐길 줄 알게 된 그 순간이 조금은 어른이 된 그 순간이 아닐까. 새로이 즐길 줄 알게 되면서 그 맛이 가져오는 기억, 생각의 흐름, 이런 것들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린티라떼의 쌉싸름함을 끊임없이 되새기던 내 모습처럼.


     2016년은 나에게 배움의 한 해였다. 한 면만 존재하는 무언가는 없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린티라떼의 달달함 뒤에는 쌉쌀함이 있었고, 그리고 나는 그 쌉쌀한 맛까지 즐기게 되었다. (이제는 그 쌉쌀한 맛을 더 좋아해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말차가루만 찾는다.) 좋아하지 않던 모습까지도 잔인했던 2016년이지만 다시 보면 나를 단단하게 해 준 한 해였다고 볼 수 있다. 예상치 않은 일들을 겪으며 나는 조금 더 단단해졌고 조금 더 유연해졌으며 조금 더 무던해지기도 했다. '인생의 새로운 맛을 알고 전에는 좋아하지 않던 일부 맛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랄까? 2016년을 스르륵 보내버린 2017년의 나는 즐길 수 있는 것이 하나 더 늘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늘었다. 이런 식이면 언젠가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잔잔히 흐르는 물결을 따라가듯 자연스럽고 느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몇 장의 그린티라떼 (혹은 녹차 관련) 사진들 :)

-> 집 앞 카페, Pavement는 녹차 시럽을 쓰기 때문에 그린티라떼가 단 편이지만 따뜻하게 마시면 추운 날 아주 맛있다. 같이 보이는 샐러드도 굉장히 맛있었다.


-> 그린티라떼를 사랑하는 나는, 제주의 오설록 녹차밭까지 찾아갔다.


-> 한정판 녹차 스프레드가 들어간 녹차 롤케이크와 녹차 아이스크림이 얹어진 녹차 오프라도. 그땐 녹차 스프레드가 기대 이하라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 생각난다. 혼자 갔던 탓에 2인분을 먹은 기분.


                            -> 설빙의 녹차빙수









-> 아마도 thinking cup의 그린티라떼

    







호수가 보이던 할리스카페 지점의 그린티라떼 ->







-> 제주 한 카페에서 마신 그린티라떼 - 눈코입은 내가 그렸다. 비 오는 제주는 꽤나 운치 있었다.




덧, 녹차 (그린티) 에 대한 제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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