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나 Nov 10. 2017

아날로그 제주 여행

나 홀로 제주 뚜벅이 여행

        "정말 미안한데, 내가 내일모레 출장이 잡혀서 육지로 올라갈 것 같아- 어쩌지...?"

        "응??? 나 그래도 내려갈 거야!"

제주도로 발령을 받은 친구를 보러 2주 휴가 중 하루를 쪼개 당일치기 제주 여행을 계획해놨던 참이었다. 초중고 다 같은 학교를 다녔어도 고등학교 졸업 후 근 10여 년을 보지 못한 친구를 본다는 데에 너무 신이 나서 무작정 왕복 제주행 비행기 표만 사놓았던 차였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개통되지 않은 폰은 사진만 찍기 위한 기계에 불과했고 (와이파이가 있을 때만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었다), 무면허와 다를 바 없는 장롱면허 8년 차였다.


에라 모르겠다. 오랜만에 제주도도 가보고 싶었으니 일단 가보기나 하자! 



        2017년판 아날로그 여행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마음이 두근거렸다. 불과 20년 전,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내비게이션이 막 보급되기 직전이라 우리 가족은 항상 지도를 보며 다녔다. 어디에서 어떤 길을 따라가야 하고 몇 번 국도를 타야 하며 고속도로에서 몇 번 출구로 나와야 하는지 미리 표시도 해두었고 다니면서도 원래 가려던 길을 잘 가고 있는지 몇 번씩 체크하곤 했다. 그런 엄마, 아빠의 모습을 차 뒷자리에서 보면 꼬불꼬불하고 알록달록한 길들이 빽빽하게 채워진 지도에서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길이 어떤 길인지 찾아내는 엄마, 아빠가 참으로 대단해 보였었다. 그런데 그런 대단한 일을 내가 도전해 보기로 했다!


     우선 (나를 버리고 출장을 간) 친구가 추천해준 국수 맛집과 찾아가 보고 싶던 소녀상, 그리고 녹차밭을 기준으로 동선을 짜기 시작했다. 나만의 작은 지도에 출발 지점과 도착 지점을 적고 어떤 식으로 이동할 것인지도 꼼꼼히 조사했고, 제주도에 가기 전날 연락된 다른 동생과의 저녁 약속 장소까지도 추가해 동선을 확정 지었다. 녹차밭에서 저녁 약속 장소까지를 제외하고는 다행스럽게 모두 버스로 이동이 가능했다.


     아침 9시 20분. 제주에 도착하자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나를 반겨주었다. 미리 조사해놨던 버스를 타고 국수 가게를 찾아갔는데 대기시간이 무려 50분이란다. 아침부터 고기국수를 먹으려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을 줄이야! 순서를 조금 바꿔서 대기하는 동안 근처에 있는 소녀상을 보러 (버스를 타고!) 다녀왔더니 주인아저씨께서 딱 내 이름을 불러주셨다. 여행 시작부터 시간을 효율적으로 쓴 것 같아 나머지도 더더욱 기대가 됐다. 



    맛집이라고 소개받은 국숫집은 비가 오는 날임에도 아침 일찍부터 사람들이 북적거렸고 메뉴는 고기국수 단 한 가지뿐이었다. 국물이 뽀얗게 우러난 돼지고기 국수는, 비 오는 겨울 아침 제주 여행객의 몸을 녹여주었다. 계산하려는데 구수한 사투리 섞인 말투로 '맛있게 드셨습니까~?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는 주인아저씨가 국수가게를 더 정겹게 만들었다. 단 두 마디에 괜스레 내가 귀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몸도 녹였고 기다리는 동안 소녀상도 보고 와서 녹차밭으로 가기로 했다. 미리 사진 찍어온 지도를 보며 정류장 쪽으로 걸어가는데 멀리서 봐도 꽤 커 보이는 정류장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바글바글, 앗 뭔가 이상하다. 내가 타려던 버스를 포함해서 시외버스는 한 시간에 한 대 꼴로 오는 스케줄이었고 녹차밭으로 가는 버스는 내가 도착하기 10분 전에 떠나버려 다음 버스까지는 50분이나 남았다.



    사람 구경을 했다. 여기 제주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했다. 전혀 이해 못하겠던 제주 사투리는 제주도 사는 사람이면 모두 사용하는 걸까? 실제로 들으면 정말 알아듣지 못할까? 옹기종기 모여계시던 할머님들에게서 우리 외할머니가 겹쳐 보였다. 함께 계셔도 전혀 어색할 것 같지 않았다. 시내라 그런지 동양인 여행객들과 서양인 여행객들도 꽤나 보였다. 그들에겐 제주가 어떻게 느껴질지 궁금해졌다. 


    건물들과 사람들을 구경하다 보니, 50분이 순식간에 지나갔고 녹차밭으로 향하는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 문이 열리는데 피식하고 말았다. 한 할머니께서 버스 노선을 묻고 비교적 젊은 버스기사 아저씨가 대답을 해주는데 모르는 사이일 텐데도 어찌 그렇게 정겹게 들리던지. 순박한 제주 사람들의 마음일까 아님 그저 제주 방언이 귀여웠던 걸까. 그렇게 귀여운 첫인상을 주신 아저씨는 비 오는 고속도로를 정말 빠르게 달리셨다. 무지막지한 덩치를 한 시외버스가 '덤빌 테면 덤벼봐'라며 주변 승용차들에 겁을 주는 듯했다. 나도 모르게 손잡이를 꼭 잡게 됐다.



    오후 2시. 겨우 도착한 녹차박물관은 생각보다 작았고 비가 와서 그런가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 안에 있던 카페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제주 지점에만 있는 메뉴와 매번 마시는 음료를 시켜 복도 한 틈에 자리를 잡았다. 맞은편 유리창으로 비 오는 모습이 꽤나 운치 있게 느껴졌다. 정신없는 자리를 피하고 싶어 금세 주문한 음식을 다 먹고 녹차밭으로 나왔다. 그렇게나 좋아하는 녹차밭을 직접 보고 신이나 질척이는 땅을 개의치 아니하고 마구 밟고 다녔다.



    비 오는 날 녹차밭은 너무나 차분하고 고요하고 그야말로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했다. 탁 트인 하늘은 옅은 회색빛이 섞인 색을 띄었고 그 아래로 너무 짙어 멀리서 보면 검은색으로도 보일법한 녹찻잎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멀리서도 바라보고 가까이에서도 바라보고 한참을 그렇게 같은 풍경을 여러 구도에서 바라보고, 가만히 서서 감상하고 담아가려고 했다. 짙은 색의 녹차밭은 나를 지탱해줄 듯 든든하게 느껴졌다. 투명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제외하면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는 내 숨소리가 전부였다. 마음이 평온해졌다. 인위적인 모든 것에서 해방이 된 순간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숨을 들이쉬고 내쉬다가 택시를 타고 저녁을 먹기로 한 장소로 넘어왔다. 택시 기사 아저씨가 애월까지 가는 중간중간에 지나치는 동네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셨다. 이게 제주 인심이려나 - 제주 현대미술관이 위치한 예술가 마을은 다음번에 꼭 와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애월에 도착했는데 기사 아저씨께서 조금만 걸어가면 바다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아저씨의 팁대로 뒤쪽으로 조금 걷다 보니 바다가 보였다. 새카만 현무암 위에 벤치가 일렬로 놓여있었다. 비는 여전하고 바람이 거세 우산이 다 뒤집어졌는데도, 나란히 놓인 벤치의 모습이 어딘가 귀여웠다. 가만히 서서 또다시 깊은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제주의 바다는 이렇게 생겼구나- 



    계속된 바람에 근처 한 카페로 들어와서 (너무 당연하지만) 그린티라테를 주문했다. 뽀얀 거품이 올려진 그린티라떼가 귀여워 얼굴을 그려놓고 라떼아트라며 혼자 좋아했다. 너무나도 아기자기한 카페였다. 실내에는 사람들이 소원을 적은 전복 껍데기들을 엮은 나무가 있었고 카페 주위에 있는 철장에도 소원이 담긴 전복껍데기도 가득 매달려있었다. 전복 껍데기 안쪽이 빛에 반사되어 은빛 무지개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아래쪽에는 작은 선인장들이 옹기종기 나란히 앉아 예쁜 연두색을 발하며 비를 맞고 있었다.



    1년 동안 휴학을 하며 제주에서 일을 하고 있던 후배를 만났다. 알게 모르게 힘들었었는지 너무 갑자기 휴학을 해서 약간 걱정하고 있었는데 얼굴을 보고 얘기를 나눠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다시 씩씩해졌다. 이제는 많이 편안해 보였다. 순박함이 가득한 제주의 힘일까. 제주 삼합을 앞에 두고 이런저런 제주 얘기를 듣고 나의 아날로그 제주 여행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좋은 사람과 있다 보면 다 그렇지만 순식간에 시간이 다 지나가버렸다. 제주에서 지내는 동안 아버님의 차를 이어받아 몰게 되었다던 그 아이는 차 안에 스피커는 없어도 엉따 (좌석시트 아래에 있는 히터?)는 있다며 몇 번이나 강조하더니, 서투른 운전실력으로 나를 공항에 내려다 주고 다시 애월로 돌아갔다. 제주가 네게 마법을 부렸구나-


    비행기 시간이 다가올수록 거세게 내리던 비가 불안 불안하다 했더니만 결국 비행기가 30분 정도 미뤄졌다. 구석에 앉아 찍은 사진을 보며 하루를 되돌아보았다. 아침에는 버스정류장에서 과연 내가 타야 하는 버스가 이 정류장에 서는 건 맞는지 발을 동동거리며 근처로 오는 버스의 번호란 번호는 눈을 부릅뜨며 보았고 내가 지도를 옳은 방향으로 보고 있는 건 맞는지 몇 번이고 확인하고 또 확인하며 다녔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느긋하게 제주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짙은 녹색으로 나를 진정시키던 녹차밭에서부터였나 보다. 인터넷 좀 안되면 어때- 전화 좀 안되면 어때- 지금 이 순간이 언제 또 올 줄 알고. 인터넷 없이, 문자나 전화 없이, 하루를 보낸 게 언제가 마지막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지내는 게 이제는 불가능할 수도 있다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 이게 얼마나 좋은지 이제야 알았다. 전파 속 누군가 대신 눈 앞의 누군가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정말 귀하게 느껴졌다. 내 숨을 제주의 숨결에 맞춰보면 제주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으려나 깊은 숨을 들이쉬고 내 쉬고. 비가 오고 춥고 이런 것은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저, 제주의 평온함과 정겨움에 둘러싸인 하루가 아주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낭만 가득 제주, 다음에 또 보자!



조금 더 나누고 싶은 제주의 추억



작가의 이전글 곰돌이 푸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