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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 Oct 15. 2017

우리의 온도

온도가 같아야만 어우러질 수 있는 걸까

햇수로 14년째.

인생의 반 이상을 함께 하고 있는, 앞으로도 쭈욱 함께 하고 싶은 그런 친구가 있다.


     어렸을 적 우리 가족은 이사를 자주 다녔다.


     그래서 나는 단짝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친구가 없었다. 초등학교 입학 직전에 서울 외곽으로 이사를 했고 초등학교 5학년이 되자마자 서울의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다. 첫 전학이 너무나 버거웠던 나는 다시 한 번의 이사 후에도 편도 30분 통학을 감수할테니 또 다른 전학은 하지 않겠노라 엄포를 놓았고 덕분에 중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아침저녁으로 다른 동네로의 출퇴근 아닌 통학을 하게 되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놀다가 같은 학원에 갔다가 같이 떡볶이를 먹으며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그런 학창 시절은 나에게는 꿈과 같았다. 단짝 친구는 내 인생에 없을지도 모른다고 포기했던 꼬맹이 시절이었다.


     그러다 H를 알게 되었다. 장난기만 가득하던 또래와는 달리, 쉽게 끓는 나와는 달리, 느릿해도 차분한 모습이 왠지 어른스러워서였을까- H는 별일 없는 현재를 감사히 여길 줄 알고 차분히 노력하는 마인드를 지닌 14살이었다. 서글서글한 얼굴에 공부도 꽤나 했고 옳고 그름의 기준이 그 나이 또래에 비해 꽤나 잘 잡혀있던- 요새 말로 '엄친아' 랄까. 나는 거의 모든 순간마다 H를 본받으려 했다. 불 위의 양은 냄비처럼 부글부글 끓는 예측 불가한 고온의 나에게 36.5도를 유지하며 잔잔히 끓어오르는 H는 내가 넘어야 할 그다음 산인 양 동경하게 되었다. 한 번 물꼬를 터버린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을 묻고 대답했다.


     우리의 온도는 분명 달랐다. 나는 기회가 주어지면 그걸 통해 더 많은 경험을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는 반면 H는 튀지 않고 적당히 평온하게 지내는 걸 더 좋아한다. H의 모든 면이 다 좋았으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능력이 되는데도 더 높은 곳을 바라보지 않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내가 H를 이해 못하는 순간도 많았고 답답한 마음을 H에게 토로하곤 했었는데, 그때마다 H는 큰 충돌 없이 내 불만을 들어주기만 했다. 돌이켜보면 H도 내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던 순간이 많았을 거고 본인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 답답하고 속상했던 순간도 있었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들어주었다.


     그런 식으로 (각자) 연애도 하고 수능을 치르고 입시를 치르고 군대를 다녀오고 유학을 가고 입사를 하고 자리를 잡다 보니 벌써 14년이나 흘렀다. 함께 한 시간보다 그러지 못한 시간이 훨씬 긴데도 마음속엔 H가 꽤나 큰 자리를 차지한다. 함께 어울리는 친구들 중에서도 나는 가장 기쁘고 가장 힘들고 가장 신기하고 가장 화가 날 때 가장 먼저 H에게 이야기하고 조언을 구하려고 한다. 지금까지 계속 그래 와서 일 수도 있고 항상 나보다 더 성숙한 것 같은 H라면 조금 더 현명한 답을 낼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질풍노도의 사춘기 시절 알게 된 친구에게 소소한 연애 얘기 공부 얘기만 하던 우리가 이제는 커리어를 얘기하고 각자의 미래 계획을 나누곤 한다. 함께 나이를 먹고 성장한다는 게 그저 신기하고 행복하다. 쌍둥이 형제가 있었다면 비슷한 감정을 가지지 않았을까-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너무 많고 함께한 시간도 생의 반만큼이 될 정도로 쌓여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 속에서 희로애락의 모든 감정이 오고 갔다.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고 그런 내 모습이 옳지 않을 땐 옳지 않다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기쁘다. 연락을 매일 하지 않아도 무탈하게 건강히 지내고 있을 것이고, 내게 무슨 일이 생기고 내가 어떤 사고를 치더라도 묵묵히 옆에서 친구로 남아주리란 믿음이 있다. 사방이 가시가 쳐져 있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따끔한 조언도 아끼지 않고 해주는 친구가 있어서 나는 조금 무던한 사람이 되었고 (여전히 팔팔 끓는 기질이 있지만) 위험이 조금 적은 고온으로 내려왔다.


     나의 온도와는 너무 다른 H와 복작대며 지낸 14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계속 궁금했던 것이 있다.


어떤 조건으로 내게 맞는 사람, 맞지 않는 사람으로 분류하는 걸까?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사는 것 같다는 느낌을 꽤나 많은 순간 느꼈다. 성인이 된 후에 만난 사람들 뿐 아니라 그 어렸던 학창 시절에도 이 사람은 이게 본모습이 맞나 싶었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렇게 가면을 쓰고서 본인과 같은 처지에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 타인을 경계하고 외로움을 호소하고, 본인과는 맞지 않다고 결론 지어버린 사람의 이해할 수 없는 점을 험담하기까지 한다. 세상에 나와 같은 모습을 한 사람은 없다.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쉽게 말해 매일 먹는 것이 다르고 매일 만나는 사람, 나누는 대화도 일치할 수 없는데 나와 같은 모습을 한 사람이 있는 건 기적으로도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온도가 같아야만 내게 맞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옳지 않은 것 같다. 누군가에게 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 내 온도를 바꾸는 것도 너무 잔인한 일이다.


     나와 H의 온도는 다르다. 그냥 다른 것도 아니고 이 둘은 도대체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지 싶을 정도로 다르다. 가치관 일부는 두말할 것 없고 관심사도 다를 때가 더 많다. 만약 내가 H를 이해할 수 없었던 처음 그 순간, H를 나와는 맞지 않는 사람으로 결론 내리고 거리를 두었다면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었을 것이다. 상상하기도 싫은 시나리오다. 비록 우리의 온도는 다르지만 나는 H덕분에 더 나은 사람이 되었고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H도 같은 생각을 하기를 바라고...!) 서로의 온도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태껏 큰 충돌 없이 좋은 친구로 잘 지낼 수 있던 건, 온도가 다름을 인정하고 100% 이해하지는 못해도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해서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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