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나 Nov 06. 2017

곰돌이 푸 이야기

굿바이 크리스토퍼 로빈 (Goodbye Christopher Robin)

     올해는 코스튬을 준비할 새도 없이 다가온 할로윈 덕에 나는 올 블랙의 차림을 하고 블랙 카나리(Black Canary)라 우기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할로윈을 즐기곤 싶으면서도 화요일을 요란스럽게 보내고 싶지는 않아 근처 인디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한 편 보기로 했다. 얼마 전부터 보려고 했던 굿바이 크리스토퍼 로빈 (Goodbye Christopher Robin)이 마침 상영 중이길래 표를 끊고 들어가 앉았다.


     줄거리를 짧게 이야기해보자면 이 이야기는 곰돌이 푸를 지은 A. A. 밀러의 이야기이다. 곰돌이 푸에 나오는 크리스토퍼 로빈은 실제 밀러의 아들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단 둘이서 며칠을 보내게 되면서 밀러는 어린 아들과 숲을 산책하고 놀아주는 와 중에 상상 속 나래를 펼쳐주고 이걸 진실이라 믿는 아들을 그린 책이 곰돌이 푸 인 셈이다. 밀러의 책이 전쟁 직후의 사람들에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일깨워주기 시작하면서 엄청난 속도로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당연하게 밀러는 아들과 보내는 시간이 적어졌고 아들은 엄마 아빠가 불러주던 이름인 빌리 문이 아닌 자신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동화 속 이름인 크리스토퍼 로빈으로 더 많이 불리게 되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유도 모른 채 자신이 입던 옷 대신 동화 속 크리스토퍼 로빈의 옷을 입고 끊임없는 인터뷰를 하는 게 일상이었다. 고작 대여섯밖에 안된 나이에.


출처: imdb


     결론은 훈훈하게 마무리되었지만 나는 그 행복한 마무리에 도달하기 전까지가 조금 불편했다. 나도 모르게 빌리 문에게 몰입해 버리고 말았다. 그만큼 어린 나이는 아니었지만 학창 시절에 이런저런 기회로 티비 프로그램에 몇 번 나오게 된 일이 있었다. 성적이 상위권이긴 했어도 전교권은 아니었으나 어쩌다 보니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분들이 찾는 조건에 맞게 되어 출연하게 된 케이스였다. 당시엔 아무 생각 없이 신난다는 생각으로 출연 제의를 받아들였고 좋은 추억이 될 것이라 생각했었다. 어떤 후폭풍이 일어날지는 전혀 모른 채.


     방송이 나간 이후 여기저기에서 내가 당최 들어본 적도 없는 친구의 친척이 티비에 나온 내 모습을 보고 내 주변 사람에게 나를 아는 척 이야기하는 일도 있었고 새로 만나는 사람들도 아는 사람이 내가 나온 방송을 보았다면서 한 마디씩 하곤 했다.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나는 1등과는 거리가 먼 학생이었는데 방송을 본 사람들은 내가 마치 전국 1등은 아니더라도 전교 1등은 하겠지. 그러니 저기에 나왔겠지- 라는 식의 기대감을 가진 눈으로 방송 얘기를 꺼내곤 했다. 너무 불편했다. 나는 공부를 제일 잘해서 방송에 나가게 된 사람이 아니었고 방송에서도 공부를 그렇게 잘하는 편은 아니라고 밝혔었는데 사람들은 내 말은 듣지도 않은 듯 이미 엄청난 두께의 색안경을 끼고 나를 보고 있었다.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근 10년 쯤이나 지났는데도 아직 내가 나왔던 방송을 언급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불편해졌다. 나도 기억 못 하는 방송의 내 모습을 기억하는 타인이라니! 이건 내 속마음을 들킨 것도 아니고 나를 어떻게 포장해서 바라보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알록달록한 색안경을 끼고 있던 사람들은 직접 알고 보니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듯한 반응을 보일 때도 있었다. 너무나 소름이 돋았다. 나는 단 한차례 실수도 하면 안 될 것 같이 느껴졌다. 누군가 내가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렸던 걸 기억하고 어디에 고발이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 잊히겠지 주문을 외며 보냈던 날들이 있었다. 차라리 방송에 나가지 않았더라면 나를 향한 기대감 따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텐데. 그랬으면 실망감도 없었을 텐데.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빌리 문에게 몰입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영화에서는 사람들이 빌리 문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긴 해도) 굉장히 사랑해주는 입장이긴 했지만 누군가가 본인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 눈 앞에 맑지 않은 막을 하나 더 끼고 본인을 바라보는 상황이 비슷했으니까. 아무도 모르게 막을 깨끗하게 닦아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시간이 얼마가 걸리건 다 닦아주고 싶었다. 나는 이 색안경이 지워지지 않는 꼬리표, 주홍글씨와 다를 바 없다 생각했었다. 빌리 문이 자라는 내내 누군가에게는 크리스토퍼 로빈이었고 가상의 인물에 대한 기대를 본인이 다 받아들여야 했었을 것이다.


     시간이 답이었을까 - 빌리 문은 다 자라 소년병으로 전쟁에 다녀오게 된 후에야 본인을 크리스토퍼 로빈으로 만들었던 부모에게 다시 마음을 열게 된다. 이제는 시간이 많이 흘러 내가 나온 방송을 볼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게 되었다. 그때 방송을 봤던 사람들도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한가 보다. 아직도 나는 내가 나왔던 방송들이 그다지 유쾌하진 않지만 이제는 적어도 누군가가 그 방송을 보았다며 내게 연락을 해오면 - 나도 기억 안 나는 오래전 방송을 보았구나. 오랜만에 연락해줘서 고마워! 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적어도 나는 색안경은 끼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렇게 괴로워하던 시간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조금 유연하게 나의 과거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이젠 이 문제에 있어 예전보단 덜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스킬이 생겼구나 하고 피식 웃을 수 있었다.

  

      나의 마무리는 씁쓸했지만 영화 자체는 중간중간 빌리 문의 순수함이 엿보이는 장면이 가득한 영화였다. 자신의 곰돌이만을 Winnie로 인정하고 장난감 가게에 있는 똑같이 생긴 곰돌이들은 Winnie가 아니라 하는 점이나 백조를 Pooh라고 이름 지어 백조를 불렀다가 무시당해도 다른 사람들이 못 알아듣도록 한다는 둥 아빠와 둘만의 비밀을 간직하려고 하는 부분도 영락없는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영화 상영 중 대부분을 나도 모르게 미소 지었고 작은 영화관에 나와 함께 앉아있던 노부부도 티 없이 맑은 빌리 문의 모습이 귀엽다며 너무나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처럼 시끌벅적하게 보내진 않았어도 끊임없는 엄마 미소를 지으며 순수한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는 걸로 충분한 할로윈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Bravo! 오 포르투 (Oporto)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