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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 Aug 23. 2020

기억 레시피

힘이 없을 땐 기억으로 요리를.

     기억은 마치 어떤 요리를 위한 재료 같다. 재료들은 비슷하기도 하지만 세세히 보면 전부 다 다르고, 완전히 다른 경우도 많다.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을 때도 많은데 신기하게도 한 기억 재료는 다른 기억 재료를 떠올리게 하고 이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레 어우러져 절로 미소 짓게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나도 모르게 모인 재료들이 그때그때 나의 기분에 맞는 기억 요리를 한다. 다양한 재료들 중에서도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하자' 다짐하게 했던 기억 재료들은 자신감이 떨어져 있거나 울적할 때 딱 좋은 요리를 만들어내곤 한다. 그리고 이 요리들은 내가 얼마나 복이 많은 사람인지 다시 떠올리게끔 해준다.


     메인 재료 1.

학창 시절 봉사활동으로 연탄 기부를 한 적이 있었다. 1년 동안 모은 돈과 따로 받은 기부금으로 무얼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서울에 아직도 연탄을 때는 동네들이 있는 것도 신기했고 생각보다 연탄 가격이 높아 필요한 분들이 겨우내 요긴하게 쓰일 수 있을 것 같아 연탄 기부에 쓰기로 했다. 무튼 그렇게 반나절 정도 연탄을 나르러 다녔는데, 춥기도 춥고 장갑을 꼈는데도 손 안쪽에 연탄이 묻어났고 연탄을 나르는 동안 안경을 올리고 바람이 스쳐가며 간지러 진 볼을 스윽 훔치다 보니 얼굴에도 연탄이 검게 있었다. 가장 마지막 집에 연탄을 다 나르는데 할머니께서 너무 고마워하시며 손이라도 씻고 가라고 세숫대야에 따뜻한 물을 가득 담아주셨다. 그 순간 마음속이 찡- 아주 어릴 적 같이 살 적에, 밤마다 다 타버린 연탄을 새 연탄으로 갈러 나가시던 우리 할머니가 생각이 나서 할머니를 안아드렸다. 사랑이 이런 것일까. 봉사활동은 이런 따뜻한 배움의 순간 때문에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일까. 이 순간을 느끼게 된 나는 복이 많은 사람이다.

     

     메인 재료 2.

각 방향 한 차선씩 밖에 없는 이차선 도로 두 쌍의 교차로에 있었다. 나는 택시를 타고 있었는데 반대쪽에서 차들이 갑자기 휙휙 지나가는 게 아닌가! 신호도 빨간색이었는데 말이다!! 조금 지나니 앰뷸런스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면서 차들이 왜 신속히 길을 트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빠른 움직임에 '아- 이 동네는 앰뷸런스가 지나갈 때 이렇게까지 빠릿빠릿 움직이는구나' 하며 감탄하고 있었다. 우리 쪽 신호가 바뀌어 조금 앞쪽으로 가보니 그 차들 앞에는 수신호로 일사불란하게 차들을 지휘하던 한 남자가 있었다. 아, 영웅... 그때 내 머릿속을 스쳐간 단어였다. 앰뷸런스가 무사히 지나가고 그 남자는 길을 유유히 건너는 것을 보아 지나가던 사내 1 정도의 사람이었던 듯한데 화창한 주말 낮의 꽉 막힌 도로에서 앰뷸런스가 빠르게 빠져나가지 못할까 주저 않고 차들을 통솔했던 그 모습은 아주 커 보였다. 그리고 내게 콩깍지가 씐 게 아니란 걸 증명하듯 주변 사람들은 박수갈채를 보내고 휘파람도 불었다. 평균을 살짝 웃도는 키를 가진 그는 거대한 영웅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순간을 함께 한 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간단한 양념 재료들

'누나는 빛 같은 사람이에요.' 라던 L

추운 날씨에 밝은 웃음으로 새로 나온 이슈를 소개하던 빅이슈 판매원 아저씨

군고구마를 팔러 나온 할아버지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조용히 앉아있던 포메라니안 강아지 두 마리

내내 마음을 열지 않다가 헤어지기 직전에 마음을 열어준 상처가 많던 그 아이

자리를 양보받으셨다가 내리실 때 나보고 다시 앉으라고 해주셨던 할머니

내 만 17세 생일에 다친 발로 17송이 분홍 장미를 선물로 준 H

내가 70살까지만 살겠다니 내가 심심하지 않게 71살까지 살겠다고 했던 S

큰 일을 겪은 뒤에 내게 비 오는 밤에 특히 차 잘 보고 다니라며 챙겨주던 S

정신적으로 굉장히 피폐해지는 일을 겪었을 때 나보다 더 화를 내주던 K

꿋꿋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소신 있게 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S

(오늘은 이하 생략 :))


     좋은 기억은 추억이 되고 나는 그 추억을 곱씹으며 나를 보듬기도 하고 배우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누군가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더니, 추억으로 요리를 하는 건 나뿐만은 아니었나 보다. 거센 풍파가 왔을 땐 따뜻한 국물 같은 따뜻하고 얼큰한 기억 재료들로 만든 요리로. 감정이 격해져 있을 땐 채소무침 같은 시원한 기억 재료들로 만든 요리로. 흔들리는 순간 나를 잡아주는 건 '그때 그 순간'이라 불리는 기억 재료들이고 나를 더 좋은 어른으로 성장케 하는 건 그 기억 재료들로 만든 요리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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