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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엽서시 Jan 30. 2024

「수라(修羅)」

서른 넘어 다시 읽기

※ 주의: 오늘은 다시 읽는 작품의 특성상, 거미 사진이 있습니다.      


 당신은 가난합니다. 당신이 가난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당신이 잘 알고 있을 만큼, 당신은 가난합니다.

아내도, 집도 잃어버린 당신은,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 쓸쓸한 거리 끝의 좁다란 방에 누워 있습니다.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고, 습내 가득한 추운 방에는, 오직 때묻은 낡은 셔츠의 그림자만이 흔들립니다. 당신은 가난하고, 당신은 쓸쓸합니다.     


 이때 당신은 방바닥 위에 무언가가 아물거리고 있는 것을 깨닫습니다.        



거미 새끼 하나 방바닥에 내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느젠가 새끼 거미 쓸려 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 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 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 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라운 종이에 받아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와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수라(修羅)」, 백석(『사슴』, 1936)             



 백석이 최고의 시인이라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가 천재 시인이라는 것에는 대부분 고개를 끄덕입니다. 누구는 그의 걸작으로, ‘외롭고 높고 쓸쓸한’ 「흰 바람벽이 있어」를, 또 누구는 ‘정정한 갈매나무’를 생각하며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을 꼽기도 합니다. 자야 김영한과 백석의 인연을 아는 사람이라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꼽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차 한구석에서 흐느껴 우는 어린 계집아이를 그려낸 「팔원(八院)」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고, 산꿩도 슬피 우는 날 눈물방울과 함께 머리오리를 떨어뜨린 「여승」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백석’의 이름을 들으면, 이 작품, 「수라」를 떠올립니다.     

  

 사실 「수라」라는 작품을 조금 뜬금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특히, 작품과 내용이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교과서에서는 ‘수라’가 ‘가족과 민족공동체가 붕괴된 1930년대의 조선‘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뜬금없는 해석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제목의 해석은 둘째치고, 작품을 한 번 찬찬히 읽어봅시다.     


결코 반갑지는 않은 상황입니다.

 1연은 작품의 상황입니다. ‘거미 새끼’가 하나 ‘방바닥’에 출몰하고, 나는 그것을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 ‘버리’고 맙니다.     


 반전은 2연에서 일어납니다. ‘새끼 거미’가 쓸려 나간 곳에 ‘큰 거미’가 나타났습니다. 사실 이렇게 거미가 연속적으로 나타난다면(그것도 큰 거미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상당히 기분이 찝찝해 할 텐데, 이상하게도, 나는 가슴의 짜릿함을 느낍니다. 심지어 ‘큰 거미’를 쓸어버리며 서러워 합니다.      


 3연에서 우리는 백석이 거미를 쓸어버리며 가슴이 짜릿하고, 서러워한 까닭을 알 수 있습니다. ‘큰 거미’를 쓸어버리고 아린 가슴이 씻겨 내려가기도 전입니다. ‘무척 작은 새끼 거미’가 나타났습니다. 이 거미를 보며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고, 서러워하고, ‘슬퍼’합니다. 그 이유는, 내가 ‘무척 작은 새끼 거미’의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이 ‘무척 작은 새끼 거미’를 ‘엄마와 누나와 형’을 잃어 버린 ‘작은 것’으로, ‘울고불고할 이 작은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즉, 내가 1연에서 쓸어 버린 ‘새끼 거미’는 아마 이것의 누나 또는 형이었을 것이며, 2연에서 쓸어 버린 ‘큰 거미’는 사라진 자식을 찾아 헤매던 ‘엄마’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백석이 어째서 거미를 쓸어버리고 이렇게 슬퍼하는지, 가책을 느끼며 고통스러워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집에 들어온 거미를 쓸어버리고 슬퍼하는 감정에 이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물론, 시인(詩人)이라는 사람들은 모든 것에서 생명을 느끼고, 공감하는 존재라 하더라도, 우리까지 그러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특히나 거미라는 대상이 그렇습니다. 공감하기 쉽지 않은 존재지요. 그러나 이 시는 충분히 우리도 백석의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돕습니다.     


 저는 그 이유 중 하나로, 교묘한 호칭의 변화를 꼽고 싶습니다. 1연에서 3연으로 가고 거미에 대한 시인의 감정이 반복되어 노출되면서, 거미에 대한 호칭이 슬금슬금 바뀝니다. 1연에서는 분명 ‘거미 새끼’였는데, 그 거미는 2연에서 ‘새끼 거미’가 됩니다. 똑같은 단어의 나열이지만, ‘거미 새끼’와 ‘새끼 거미’가 주는 느낌은 분명 다르지 않습니까?     


 2연 1행의 ‘새끼 거미’는 3연에서 ‘새끼’가 됩니다. 거미란 단어는 쏙 빠지고, 새끼만 남습니다. 3연의 거미 앞에는 ‘무척 작은’이란 수식어를 더합니다. 그리고 더는 새끼가 아니라, ‘작은 것’, 그것도 ‘울고불고할 이 작은 것’이 됩니다. 시인이 거미의 처지에 이입하는 과정이 호칭의 변화를 통해 차근차근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도 자연히 가족을 잃어버린 거미의 입장을 동정하게 됩니다.      

'새끼 거미'와 '거미 새끼'는 분명 다른 느낌을 줍니다.

 세상에, 거미를 동정하게 되다니요.


 백석이 천재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여러 관점도 있지만, 저는 백석의 시가 뛰어난 이유를, 점차 감정을 쌓아가는 멋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석의 작품은 격앙하지 않습니다. 절규하지도 부르짖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시의 끝에서 우리는 그가 의도한 감정을 마주합니다. 그리고 나면, 우리는 시에 그가 정해놓은 분명한 방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정해진 길을 따라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앞선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걷다 도착한 것처럼 자연스러운 이끌림입니다.        

     


 자, 이제 제목을 보겠습니다.    

  

 제목인 「수라(修羅)」는, 아수라(阿修羅)의 줄임말입니다. 불교에서 아수라는, 우리가 내생에서 태어날 수 있는 여섯 가지의 결과인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계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아수라에 살고 있는 존재들을 일컫는 말이기도 합니다.     


싸움을 일삼기 좋아하는 아수라는 머리가 셋, 팔이 여섯 달린 존재로도 묘사됩니다.


 인간보다 지옥에 가까운 것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아수라는 살기 힘든 곳입니다. 불교의 종파마다 약간씩 설명이 다르기도 하지만, 아수라는 끊임없는 전쟁과 싸움, 갈등이 있는 곳입니다. 모든 존재가 싸움에 휘말리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이 싸움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불교는 아수라들이 싸우는 원인은, 아수라 그들에게 있다고 설명합니다. 내가 벌이는 싸움이 다른 아수라의 고통이 되고, 다른 아수라의 고통이 내 싸움의 원인이 되어, 즉, 자신이 결국 고통의 원인이 되어 벌이는 아수라장인 셈입니다.      


 교과서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1930년대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 고통과 슬픔의 시간이었습니다. 백석은 그 고통과 슬픔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언젠가 적은 것처럼, 시인은 ‘슬픈 사람’이며, ‘세상의 온갖 슬프지 않은 것에 슬퍼할 줄 아는 혼’을 가진 존재였습니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 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 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 「팔원(八院)-서행시초(西行詩抄) 3」 11~16행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 「여승(女僧)」 3, 4연     



팔도를 떠돌면서 백석이 본 당시 조선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린아이는 집과 떨어져 살아가야 했고, 어머니는 자식을 잃고, 심지어는 자신의 슬픔마저 머리카락과 함께 도려내야 살 수 있었던 시절입니다.      


그리고 백석은 그 슬픔의 한가운데에서 자신의 행동을 목도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손짓 하나로 거미 가족을 산산이 흩트려 놓은 것입니다.     



저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이 제목이 주는 큰 통찰 생각합니다. 우리는 때로 서로가 서로의 고통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수라 같은 존재임을 잊니다. ‘아무 생각 없이’ 우리는 서로에게 고통을 주고, 심지어는 서로에게 고통을 주고 나서도 ‘아무 생각’ 없곤 합니다.      


아무런 말로 가족에게 상처를 주고도, 직원에게 함부로 말을 하고도, 직장 동료의 상처를 건드리고도, ‘아무 생각 없이’ 또 비슷한 일을 반복하기도 합니다. 고통과 슬픔은 커지고, 어느새 누군가의 ‘아무 생각’ 없는 말과 행동에 나도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고도 ‘아무 생각’ 없어보이는 그 행패에 나는 더욱 분노합니다. 세상으로 비롯한 고통과 슬픔은 점차 커져가지만, 그 원인에 대한 생각은 없어집니다.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르는 이 수라의 행동은, 어쩌면 삶이 힘든 시절일수록, 더욱 빈번해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감히 1930년대의 고통을 지금과 견주려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매일 같이 반복되는 ‘갑질’, ‘막말’ 등의 뉴스들을 볼 때마다, 저는 이 시가 떠오릅니다.


저는 이 시를 쓴 백석이 천재인 이유를, 백석이 우리를 거미의 슬픔에 공감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이 시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거미의 슬픔조차 공감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미의 처지에도 공감할 수 있다면, 우리는 분명 우리 주변의 슬픔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옛 성인들은 인간의 마음에는 누구나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는 마음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다른 존재의 아픔을 보면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그것입니다.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면 구하려고 몸이 움직이고, 누군가 아파하는 것을 보면 나도 함께 눈살을 찌푸리며 아파하는 마음입니다. 분명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남에게 고통을 주기도 하지만, 한편 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길 수도 있는 존재이기도 한 것입니다.


힘든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힘든 세상일수록, 아무 생각 없는 수라가 아니라, 서로 생각하는 마음을 통해 우리는 더욱 나아질 수 있습니다.    

  

수라가 아닌 서로.   


그것이야말로 수라가 가득하던 1930년대의 세상에서, 백석이 꿈꾼 세상이었을 것입니다.


1936년 쵤영된 백석의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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