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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엽서시 Dec 19. 2022

「절정」

서른 넘어 다시 읽기

              

매운 계절(季節)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문장》(1940)     



  이육사를 모르는 한국 사람은 없을 겁니다. 윤동주와 함께, 대표적인 저항시인입니다. 이육사의 시는 한결같습니다. 그리고 투명합니다. 그가 자신의 필명을 ‘육사(六四)’로 지은 이유도 잘알려져 있습니다. 1927년 10월 18일,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웬 택배가 배달되었습니다. 대구지점에 주는 선물이라는데, 커다란 상자가 무려 네 개나 됩니다. 한 은행원이 상자 중 하나의 포장지를 벗기자, 그 안에 나무 상자가 있었습니다. 뭔가 수상함을 느낀 은행원이 그 나무 상자 안을 다시 열어보니, 아쁠싸! 무슨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도화선이 타들어 가고 있는 폭탄이 들어 있었던 겁니다. 눈 앞의 도화선이야 당장 끊었지만 다른 상자를 열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은행원은 경찰에 신고를 했습니다. 부리나케 달려온 경찰들은 나머지 세 개의 상자를 건물 앞뜰로 내놓았습니다.

의거가 있었던 조선은행 대구지점

  그 순간 쾅! 쾅! 쾅!

  다름 아닌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이라 불리는 장진홍 열사(1895~1930)의 의거였습니다. 그런데 이 의거는, 아마 장진홍 열사는 전혀 예상치 못또 다른 한 명의 열사의 인생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습니다.

이 사건이 있자, 일제는 대구와 경북 일대의, ‘불온한 사상’을 갖춘 사람들을 마구 체포합니다. 일제에게야 불온한 사상이었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올곧고 올곧은 사상을 갖추었던 그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바로 퇴계 이황의 14대손인, ‘이활(李活)’이었습니다. 이활은 이 사건으로 대구 형무소에 264번의 수인 번호로 수감되었습니다.     



1934년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된 이육사. 옷깃의 표찰에는 본명 '이활'이라 적혀 있습니다. 흔히들 알고 있는 '이원록'은 시인의 어릴 적 이름, 아명(兒名)입니다.


  264, 이육사의 시작입니다.

  너무 극적인 이야기다 보니, 이 이야기에 대해 사실과 다를 것이다며 어깃장을 놓으려 드는 사람들도 있지만 근거가 뚜렷한 일화입니다. 시인도 이 ‘이육사’란 이름이 마음에 들었던지, 여러 버전의 ‘육사’를 만들었습니다. 찢을 육(戮: ‘도륙(屠戮)내다.’라는 말에도 이 ‘戮’을 씁니다.)에 역사 사(史)를 더해 ‘일본의 역사(史)를 찢어발기겠다(戮)’라는 의미의 ‘육사(戮史)’로도 썼고, 이 이름이 너무 노골적이라는 한 소리를 듣자, 보는 일본놈들 기분이나 나쁘라는 의미로 쓴 ‘육사(肉瀉)’는 고기를 먹고 한 설사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이 쓴 ‘육사(陸史)’는 뭍이라는 의미의 육(陸)에 마찬가지로 역사 사(史)를 씁니다. 1931년 처음 만주로 떠난 시인은 광활한 만주벌판을 우리 민족이 발한 역사의 근원지로 여깁니다. 이러한 시인의 역사관은 ‘백마 탄 초인’이라는 구절로도 유명한 시, 「광야」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광야」 2연, 《자유신문》(1945)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

  아마 ‘육사(陸史)’의 뜻도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인은 일본이 바다의 세력이고 바다의 역사라면, 한민족의 역사는 광야의 역사요, 뭍의 역사라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요?     



  사실 이육사의 시는 시인의 삶을 떨어트려 놓고 감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절정」은 한 번 이육사의 삶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읽어봅시다. 극한에 몰린 한 사람, 그러니까 엄청나게 힘든, 말 그대로 인생에 있어 최악의 순간을 둔 사람의 심정을 떠올리며 말입니다.      


매운 계절(季節)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절정」 1, 2연     


AI가 그린 「절정」의 1연

  아마 학창시절, 1연의 북방 ‘수평적 극한’이니, 2연의 ‘고원’ ‘수직적 극한’이니 했던 기억이 날 겁니다. 멋들어지지만 머리 아픈 그런 단어들은 내려놓읍시다. 말 그대로 시인은 ‘채찍에 갈겨’ ‘북방’까지 ‘휩쓸려’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아직 시련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시인은 아직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매운 계절의 채찍’을 피해, 낯선 풍속이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떠나,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 ‘고원’까지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매운 계절’은 계속 나를 쫓아옵니다.

  그러자, 여기서는 마치, 요즘 영화의 특수효과가 덧씌워진 장면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조금 전까지 발을 디디고 있던 ‘고원’이 점점 좁아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칼날’처럼 좁아지는군요. 자, 시인이 있던 곳은 ‘고원’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칼날’의 양 옆은 발 디딜 곳 없는 낭떠러지겠군요.

시인은 고개를 듭니다. 이 ‘매운 계절’이 나를 포기하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절정」 3연     


  포기하기는커녕, ‘매운 계절’이란 녀석은 독 안에 든 생쥐를 보는 표정으로,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내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무릎을 꿇어야’ 할까. 그 순간, 나는 나에게 놓인 상황이,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군요. 나에게는 굴복마저 허락되지 않습니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절정」 4연     


AI가 그린 「절정」의 4연

  시인은 눈을 감습니다. 좌절과 절망으로 인한 포기일까요? 아닌 것 같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인가 보다, 라고. ‘겨울’은 1연부터 시인을 죽어라 쫓아온 ‘매운 계절’로 보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강철로 된 무지개’, 이 말은 대체 무슨 뜻일까요?

  학창 시절, 우리는 이 구절을 이질적인 이미지인 ‘강철’과 ‘무지개’가 서로 결합하여 만들어낸 역설적 이미지로 보았습니다. ‘강철’은 폭력, 근대화와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지요. 이렇게 보면 ‘강철’은 부정적인 이미지입니다. ‘무지개’는 아름다운 이미지입니다. 즉 긍정적인 이미지입니다. 두 이질적인 이미지가 충돌하여 선명한 인상을 자아내는 것을 문학에서는 역설법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시인은 ‘서릿발 칼날’ 위에서, 굴복조차 허락되지 않는, ‘매운 계절’을 눈앞에 둔 절체절명의 순간,  선명한 이미지 만들고 있는 관념적인 사람이 됩니다. 글쎄요, 저희가 아는 이육사 시인의 모습은 아닌 것 같네요.

  그래서 이 구절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그 중 제가 가장 마음에 드는 해석은 이것입니다.

  ‘강철로 된 무지개’를 따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로 묶어서 함께 해석하는 것입니다. ‘겨울’은 시인이 맞닥뜨린 절체절명의 위기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위기가 최고조에 달한 ‘절정’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아무 희망도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 곳에서 희망을 마주합니다.

  지금이 더 없는 최악의 순간이라면, 이제 앞으로는 조금씩 나아지겠구나, 아니, 나아질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 순간이 겨울의 절정이라면, 이 순간이 지나는 시간부터 온도는 조금씩 따뜻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씩 온도가 따뜻해진다면, 마침내 계절은 봄으로 나아가고, 어느새 봄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시인은 확신을 느낍니다. 그 확신의 이미지가 바로 ‘강철로 된 무지개’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무지개’는 다리나 교량의 이미지로 쓰였습니다. 그런데 다리로서 무지개는 순간적이고, 또 유한(有限)합니다. 바이킹 신화의 ‘비프로스트’ 다리는 신의 세계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다리이지만, ‘헤임달’이라는 파수꾼 때문에 인간은 결코 건널 수 없는 다리입니다. 또 신들에게 있어서도 완벽한 다리는 아닌지, 걸을 때마다 천둥이 나오는 벼락의 신, ‘토르’에게 이 다리는 너무나도 연약한 다리였습니다. 그래서 신화에서조차 ‘토르’는 이 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굳이 돌아가야 했다고 합니다.


비프로스트 다리를 돌아서 건너는 천둥의 신, 토르

  동양에서도 무지개는 마찬가지의 이미지입니다. 천계(天界)와 같은 초월적 세계와 연결되는 다리, 또는 매개체이지만, 일순간에 사라지는 이미지입니다. 이육사 역시 이러한 무지개의 이미지를 빌린 시를 쓴 바 있습니다. 이육사의 시 중에서는 굉장히 서정적인 시, 「파초(芭椒)」의 마지막 연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항상 앓는 나의 숨결이 오늘은

해월(海月)처럼 게을러 은(銀)빛 물결에 뜨나니     


파초(芭椒) 너의 푸른 옷깃을 들어

이갓 타는 입술을 축여주렴     

              (중략)     

그리고 새벽 하늘에 어데 무지개 서면

무지개 밟고 다시 끝없이 헤어지세

                                            -「파초」 부분, 《육사시집》(1946)     


파초는 바나나 비슷한 식물입니다. 예로부터 문인들이 사랑한 식물입니다. 왼쪽의 파초 그림은 다름아닌 정조의 그림입니다.

  이 시에서 시인은 ‘파초’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앓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파초’는 마치 옛 연인처럼 찾아와 시인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위안의 순간도 ‘새벽’이 오기 전까지의 일입니다. 새벽이 오자, ‘파초’는 ‘무지개’ 다리로 길을 떠납니다. 한낮, 아니 아침만 되어도 영영 사라져 버릴 ‘무지개’. 그래서인지 ‘파초’도 시인과의 이별이 아쉬운지, ‘무지개’를 건너가지 못하고, ‘무지개’를 밟고 있는 그 모습으로 시인과 헤어지는군요.

  다시 「절정」으로 돌아가 봅시다. 시인은 이 약한(?) ‘무지개’의 이미지에 ‘강철’을 결합합니다. ‘강철로 된 무지개’는 ‘강철로 만든 다리’로 읽을 수 있습니다. 철교(鐵橋)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시인의 강한 확신을 느낄 수 있습니다. ‘겨울’은 시인에 의해서 단단한 ‘철교’로 탈바꿈합니다. ‘겨울’ 다음에는 뭐가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봄’. 시인이 간절히 바라는 봄입니다.

  “그럼 처음부터 ”겨울은 봄으로 가는 철교다.“ 이렇게 표현하면 안되나?”

  아마 몇몇 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습니다. “겨울은 봄으로 가는 철교다.”라고 표현하지 않고,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라고 표현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문학의 갈래가 시니까요. 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라고 표현함으로써, ‘겨울’을 지금 내가 처한 시련과 고난으로, ‘무지개’를 실낱같은 희망으로 해석한다면, 나의 확신에 해당하는 ‘강철’의 역할을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곱씹어 볼수록 멋진 표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를 다르게 해석하는 분도 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육사는 퇴계 이황의 14대손, 안동에서도 유명한 유학자 집안이었습니다. 어릴 때는 조부로부터 한시(漢詩)와 고사(古事)를 배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시 구절과 중국 고사가 대체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사실 ‘무지개’와 관련한 유명한 고사가 있습니다. 바로 ‘백홍관일(白虹貫日)’이라는 사자성어입니다. ‘백홍관일’은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다.”라는 의미입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천문 현상을, 특히 해와 관련된 현상은 하늘이 임금에 대한 어떤 징조를 내려주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특히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현상은 신하가 임금에 대해 역심(逆心)을 품은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백홍관일’과 관련하여 역모와 연결하거나(기묘사화), 임금이 반찬 가짓수를 줄이고 자신의 과실을 돌아보는 계기로 해석한 사례가 많이 보입니다.


'홍(虹)'은 색깔의 순서가 뒤바뀐 무지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런 무지개였을까요?

  그런데 이 ‘백홍관일’이라는 사자성어가 다른 의미로 쓰인 고사가 있습니다. 바로 진시황과 관련된 고사입니다. 중국의 전국시대는 진(秦), 조(趙), 위(魏), 한(韓), 연(燕), 제(齊), 초(楚), 이렇게 일곱 나라가 자웅을 겨루었던 시기입니다. 그러나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사실 이미 진나라는 초나라와 더불어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진시황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부국강병책을 쓰기 시작하면서, 차츰 전국시대는 진나라 위주로 통일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만리장성이 무리하게 이어져 있네요. 중국에서 만든 지도 같습니다.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중국 대륙, 이른바 중원(中原)과 가장 멀리 떨어진 나라가 바로 연나라입니다. 이 연나라 태자 단(丹)은 과거 진시황과 인연이 있었습니다. 진시황과 단은 어렸을 때, 조나라의 수도에서 인질로 체류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기』에도 이 둘이 “즐겁게 지냈다.”라는 표현이 있는 것을 보면, 이국의 땅에서 아홉 살이었던 진시황은, 조금 나이가 많았던 단을 의지했을 겁니다. 어린 아이들일수록 나이 한 살 많은 것을 대단하게 생각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시절이 바뀌어 진나라가 강대국이 되자, 이제 단은 진나라에 인질로 끌려가게 됩니다. 어쩌면 단은 진시황과의 옛 인연을 떠올렸을 겁니다. 그러나 단을 마주한 진시황은 예전같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단을 보고 떠오른 옛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사서에서는 진시황이 “예를 갖추지 못했다(非禮).”라고 표현합니다. 심지어 진시황은 고향에 돌아가게 해달라는 단을 비웃으며 “말에서 뿔이 나지 않는 한” 진나라를 떠나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단은 우여곡절 끝에 진나라에 달아나 연나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이미 시세가 기울었습니다. 진나라는 연나라만을 남겨놓은 채, 통일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시시각각, 진나라의 군대가 움직인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이제 단에게 있어 진시황은, 개인적인 원수이면서, 동시에 조국의 원수입니다. 그러나 연나라에는 힘이 없습니다.

  군사와 병법으로 진나라를 대적할 방법이 없었기에, 단은 진시황을 암살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때마침, 연나라에는 당시 가장 뛰어난 검객이라는 형가(荊軻)가 있었습니다. 『사기』가 전하는 형가는 비범한 모습의 인물입니다. 노구천(魯句踐)이라는 검객과 시비가 붙었을 때에는 조용히 떠났습니다. 연나라에서는 축(筑: 가야금같이 생긴 고대 중국의 현악기입니다.)의 달인이었던 고점리(高漸離)와 어울려 지냈는데, 함께 어울려 놀 때에는 다른 사람을 신경쓰지 않고 웃거나 울며 시끄럽게 놀았다고 합니다(여기에서 나온 사자성어가 ‘방약무인(傍若無人)’으로, 본래는 남을 생각하지 않고 당당한 자세를 이르는 말이었습니다.). 칼 잘 쓰는 사람이 심지어 다른 친구를 데리고 시끄럽게 노니, 아마 주변 사람들 입장에서는 골칫거리였을 텐데, 전광(田光)이라는 노인은 이 형가를 눈여겨보았습니다.

  전광은 단에게 진시황을 암살할 자객으로 이 형가를 추천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형가라 한들, 진시황을 암살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게다가 성공한다 하더라도 진나라 수도에서 돌아올 수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단은 형가를 설득하느라 며칠 밤낮을 샙니다. 결국 형가는 진시황을 죽일 결심을 합니다.

  『사기』는 그 순간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옛날 형가(荊軻)가 연(燕)나라 태자 단(丹)의 의로움을 사모하여, 〔그를 위해서 진(秦)나라 왕을 죽일 결심을 했을 때〕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형가는 진시황 암살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즉, ‘백홍관일’은 일개 한 사람이 강대한 제국과 겨루기로 마음먹은 순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시인 이육사의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는 구절입니다. 심지어 우리 민족을 ‘백(白)의 민족’이라 하고, 당시 일제(日帝)는 태양을 상징으로 내걸었으니, 역사적 상황으로 봐도 알맞은 구절입니다.

이런 느낌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즉 이러한 해석으로 생각하면, ‘서릿발 칼날’ 위까지 내몰린 절체절명의 순간, 시인은 자신이 ‘겨울’, 일제꿰뚫어 버릴 ‘강철로 된 무지개’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이 칼을 갈고 기름칠을 하 이 표현을 떠올렸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습니다. 칼날 위의 기름에 뜬 무지갯빛이 이 구절을 착안하게 만들었을 것이란 추측이지요.      

칼날에 기름칠을 한 모습입니다. (출처: 네이버 카페)



  독립운동가 이육사의 삶에 대해 가타부타 말을 더할 수 있는 사람이 감히 어디 있을까요. 그러나 시인으로서 이육사에게는 다소 이러저러한 말을 덧붙이기 합니다. 시인으로서의 재능에 비해, 이육사의 작품이 지나치게 고평가되고 있다는 겁니다.

  시인의 삶과 시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시각에 대해서는 저도 어느 정도 찬성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절정」은 분명 뛰어난 작품입니다. 특히 마지막 행,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라는 구절은 쉽게 나올 수 없는 표현입니다. 시인의 삶을 고려하여 감상해도 훌륭하지만, 우리의 일상에서도 큰 의미가 되는 구절입니다.      

  삶의 고통은 마치 계절처럼, 피할 수도, 어찌할 수도 없이 닥쳐옵니다. 우리가 계절을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절정」을 읽으면서 우리는 생각합니다. 삶에 찾아든 고통이 절정에 다다른 순간, 그 순간은 더 나은 순간으로 나아가기 위한 순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의 관점에 따라, 이 고통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겨울’이 아니라 나를 위해 펼쳐진 ‘강철로 된 무지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찾아든 가장 혹독한 겨울, 그 겨울을 가장 뜨겁게 살아갔던 시인 이육사가 우리에게 선물한 희망입니다.

AI가 그린 「절정」의 4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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