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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엽서시 Apr 19. 2022

「양반전」

서른 넘어 다시 읽기

 양반이란 것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은, 술이 불콰하게 취한 아저씨들이 서로를 탓하며, “이 양반아!”하고 부를 때나, 아니면 흉을 보던 장본인이 그 자리에 나타날 때, “저 친구, 양반은 아냐.”하고 말할 때,

아니면 반찬으로 먹는 김 브랜드 정도에서나 쓰는 말일까요.     


비가 와도 뛰지 않는다는, 양반김.


 그러나 이들은 한때, 분명 한 국가와 사회를 쥐락펴락하는 계층이었지요. 그런데 다름 아닌 이 ‘양반’ 계층 그 자체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있습니다. 바로 박지원의 「양반전」입니다.      


 강원도 정선, 한 양반이 살았습니다. 가난하지만 어질고, 학식이 높았던 이 양반은 고을의 군수마다 인사를 오는 명망있는 양반입니다. 그런데 가난하다 보니, 매년 환자(還子: 춘궁기를 해결하기 위해 각 고을에서 봄마다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이를 다시 가을에 거두어들이는 일.)를 타 먹었습니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나고 보니, 양반이 받아먹은 환자가 무려 천 석에 달했습니다.

 참고로 쌀 한 석은 180L, 무게로는 150~200Kg 정도이고, 값으로는 한 냥에 해당합니다. 그러니 양반이 해먹은 쌀만 15~20톤 가까운 무게입니다. 금액만 쳐도 천 냥, 당시 한양에 다섯 칸짜리 평범한 초가집이 오십 냥, 스무 칸의 기와집 한 채가 사백 냥, 명동의 호화로운 100여 칸짜리 기와집이 이천 냥이었다니, 이 가난한 양반 한 사람이 해먹은 양이 어마어마하게 쌓인 겁니다.

 결국 이 사실을 관찰사가 알게 되자, 정선군은 발칵 뒤집히게 됩니다. 군수는 어쩔 수 없이, 양반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천 석의 쌀을 갚지 않으면, 당신을 가둘 수밖에 없노라고.

 그러나 양반이 어쩔 수 있겠습니까. 훌쩍훌쩍 울 뿐.

 이때 정선군의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부자지만, 신분이 천하였던 이 사람은 가난한 양반의 소식을 듣고 식구들에게 말을 하고 천 석을 대신 갚고 양반의 지위를 얻습니다. 양반이 쌀을 갚자, 놀란 것은 군수였습니다. 군수가 집으로 찾아가니, 웬일입니까. 양반이 패랭이를 쓰고, 베잠방이 차림으로 길바닥에 엎드려, 스스로를 ‘쇤네’라 칭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군수가 부축하며 묻자, 양반은 사정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러자 군수는,

 “군자로다, 부자여. 부가 있으나 아끼지 않으니 정의롭고, 남의 어려움을 돌보니 어질다. 낮은 것을 꺼리고 높은 것을 바라니 슬기롭다. 이는 참된 양반의 자질이다. 내 고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증인을 세워, 증서를 만들고 내 직접 서명할 것이다.”

 하며 자리를 마련합니다.

 마침내 정선군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인 앞에서 군수는 증서를 만들고, 읽습니다.     

 “건륭(청나라의 연호를 따른 겁니다.) 10년 9월, 아래와 같이 적는다.

 양반을 팔아 관가의 곡식을 갚았는데, 그 값 천 섬이나 된다.

 양반의 이름은 여러 가지인데, 글만 읽는 이를 선비(士)라 하고, 벼슬을 사는 이를 대부(大夫)라 하며, 덕이 있으면 군자(君子)라 한다. 벼슬아치들이 임금 앞에서 조회할 때 무관(武官)은 서쪽에 앉고, 문관(文官)은 동쪽에 앉으니, 이 양쪽을 합하여 양반이라 하였다.

 이제 그대는 양반이 되었으니, 이 이름 중 하나를 골라잡되, 지금까지 하던 야비한 일을 끓고, 옛 사람들을 본받아 뜻을 고상하게 가져야 한다.

 오경(새벽 3시~5시 사이)이면 일어나 불을 켜고, 정신을 맑게 하여, 두 발꿈치를 모아 꿇어 앉고 『동래박의(東萊博議: 중국 남송의 ‘동래’라는 호를 가진 학자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해설한 책입니다. 『춘추좌씨전』은 공자가 쓴 역사서인 『춘추』를 해설한 책입니다. 유학의 경전이란, 해설에 다시 해설이 붙을 만큼 어려웠나 봅니다.)』 따위의 책을 얼음에 박 밀 듯 목소리를 내어 읽어야 한다. 굶주림은 참고 추위는 견디며, 가난하다는 말은 결코 입 밖으로 내서는 안된다. 세수할 때는 주먹을 쥐고 얼굴을 박박 문대서는 안되며, 양치질을 할 때 지나치게 세게 해서도 안된다. 계집종을 부를 때는 목소리를 길게 끌어 ”아무개야.“하고 상냥하게 부르며, 걸을 때에는 느리게 걷되 신 뒤축을 끌어야 한다. 『고문진보(古文眞寶: ‘보석 같이 참된 옛글’이라는 뜻으로, 전국시대부터 송나라까지의 시와 산문을 엮은 서적입니다.)』과 『당시품휘(唐詩品彙: 당나라의 시를 엮은 서적입니다.)』와 같은 책들을 붓으로 배껴 적되, 한 줄에 백 자 씩 되도록 깨알 같이 가는 글씨로 적어야 한다. 손에는 절대 돈을 쥐지 않으며, 물건의 값은 절대 흥정하지 않는다. 집에서 밥을 먹을 때에도 맨상투로 먹지 않고 복식을 갖출 것이며, 식사 할 때 국물부터 마시지 말고, 마실 때에도 훌쩍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수저를 내릴 때 소리를 내지 않으며, 파는 생으로 먹지 않는다. 술을 마실 때에는 수염을 빨지 않고, 담배를 피울 때에도 볼이 패이도록 빨아들이지 않는다.

 아무리 화가 날 때에도 아내를 때리지 말며, 화가 나더라도 그릇을 차지 말아야 한다. 맨주먹으로 계집종을 때리지 말고, 사내종들이 잘못하더라도 매를 때려 죽이지 말아야 하며, 말이나 소를 꾸짖을 때 팔아먹은 주인을 들추고 욕하지 말아야 한다. 병이 들어도 무당을 불러 굿을 하지 않고, 제사를 지낼 때에는 종을 불러 대신 하지 않는다. 체통 없이 춥다고 하여 화롯가에 덥석 손을 뻗어 불을 쬐는 일도 없어야 하며, 말을 할 때에는 침이 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소를 잡지 말아야 하며, 고리대금업을 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이러한 행위 가운데 부자가 한 가지라도 어기거든, 양반은 이 증서를 가지고 와 원래대로 바로잡을 것이다.”

 자, 이렇게 되니, 이전까지 싱글벙글하던 부자도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양반이란 것이 요런 것입니까요? 제가 듣기로 양반으로 사는 것은 신선놀음 같다 하였는데, 이것뿐이라면 저는 헛되이 곡식만 날린 셈입니다. 좀 이로운 점도 적어주시면 은혜가 한량없겠습니다.”

 그러자 군수가 다시 증서를 만듭니다.

 “하늘이 백성을 만드실 때, 그 갈래를 넷으로 나누었다. 가장 존귀한 이는 선비요, 이 선비는 양반이라 부른다. 세상에서 양반보다 더 큰 이득은 없으니, 양반은 피땀 흘려 농사를 짓지도, 장사를 하지도 않는다. 그저 옛글이나 중국의 고사를 대략만 알고 과거를 치르는데, 크게 되면 문과에 올라 벼슬을 살고, 작게 이르면 진사(進士)가 되어 고을에서 호령할 수 있다.

 문과에 급제하면 받는 홍패(紅牌)는 두 자(대략 60Cm입니다.)도 채 이르지 못하지만, 만일 이것이 있다면 이것으로 온갖 물건을 갖출 수 있으니 돈 자루나 다름없다. 진사만 산다 하여도 음관(蔭官: 과거를 거치지 않고 오르는 벼슬입니다.)을 살 수 있다.

 지금 권세가들에게 잘 보인다면, 수령에 올라, 얼굴은 햇빛을 보는 일 없이 허옇게 뜨고, 배는 동헌 사령들의 호령소리에 맞춰 살찌는 법이다. 방안에서 옥귀고리를 손에 들고 기생을 희롱하며, 뜰 앞에는 채 창고에 들어가지 않는 곡식을 쌓아 두고 그 앞에서 학을 기른다.

 설령 궁한 선비로 시골에 살더라도,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으니, 이웃집 소를 몰아다 내 밭을 먼저 갈게 하고, 동네 농민을 붙잡아 내 밭을 김매게 하더라도, 감히 양반에게 거절하거나 양반을 욕할 수 없다. 밉보인 놈은 붙잡아 코에 잿물을 따르고 상투를 자르고 수염을 뽑더라도 감히 양반을 원망할 수 없…….”

 이때 갑자기 부자가 소리를 지르더니 증서 만드는 것을 중단시켰습니다.

 “그만하겠습니다. 맹랑한 일입니다. 저를 도둑놈으로 만들려는 겝니까.”

 부자는 머리채를 흔들고 달아나, 죽을 때까지 양반이라는 소리를 입에도 담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릴 때 우리는 이 이야기를, 지혜로운 군수가 돈만 많은 부자를 혼내주고, 가난한 양반을 돕는 이야기로 읽었습니다. 지금도 어린이용으로 나온 「양반전」 동화책의 표지들을 보면, 하나같이 가난한 양반은 불쌍하게, 부자는 뚱뚱한 풍채의, 무식하고 탐욕스러운 사람으로 묘사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박지원의 손자, 박주수가 그렸다는 박지원의 초상입니다. 박지원은 자신의 모든 초상화를 태우게 지시했는데, 이 그림만은 남아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작가, 박지원의 의도는 과연 어땠을까요?  

    

 종과 상전을 누구기에 만드신고

 벌과 개미가 이 (만드신)뜻을 먼저 아니

 한마음에 두 뜻 없이 속이지나 마옵시다.

주세붕, <오륜가> 3수, (1551)     


 마을 사람들아 옳은 일 하자스랴

 사람이 되어놔서 옳지를 못하면

 마소를 갓, 고깔 씌워 밥먹임과 다르랴

정철, <훈민가> 8수, (1580)

     

 조선 중기 양반들이 백성들을 계도하기 위해 쓴 시조입니다. 느껴지십니까? 이 양반들의 자신만만함을. 무슨 근거와 무슨 자신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은 신분의 귀천, 즉, 종과 상전을 만든 것이 하늘의 뜻이라 당당하게 말하며, ‘마을 사람들’에게 옳은 일을 하지 않으면 ‘마소(말과 소)’와 다름없다며 큰소리를 칩니다.      


아마 이 훈장님만큼의 연민을 가진 양반도 드물었을 겁니다.

 1375년, 정도전이 유배를 갔을 때의 일입니다. 노인 하나가 유학자 구경을 한답시고 정도전을 보러 왔습니다. 노인이 정도전의 종에게 유학자가 무엇인지 묻자, 종이 대답했습니다.

 “음양과 오행부터 나무와 풀이 자라고 시드는 이치, 나아가 사람이 나고 죽는 이치를 통달해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자 노인은 이렇게 말하고, 휙 떠나버렸습니다.

 “스스로 어질다 생각하며 남을 대하면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했는데,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내 보지 않아도 알 것 같네.”

 조선이 건국하기도 전, 정도전은 이 백성의 일침 속에서 성리학의 허장성세를 깨닫고 얼굴을 붉혔지만, 이 반성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왕을 대신하여,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 지었다는 두 양반의 시조에서는 그 어떤 성찰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렇게 양반들은 마치 학동을 매질하는 서당처럼, 백성들을 가르침과 회초리가 필요한 대상으로만 대했습니다.     

 그러나 병자호란이 끝난 18세기, 양반의 권위는 추락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국사 시간에 배운 것처럼, 조정의 이런저런 필요에 따라 공명첩을 남발한 탓이었지요.      


공명첩입니다. ‘나, 이런 벼슬했소.’ 하는 서류에 해당하는 공명첩은 그 자체로 어떤 역할을 수행하기보다는, 이 공명첩을 가진 사람이 양반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제는 양반이 신분과 지위, 경제적 여건을 보장해주지도 못했습니다. 몰락한 양반이 있는 한편, 많은 수는 아니었겠지만, 오히려 천대받던 백성들이 부를 쌓기도 했습니다. 박지원의 「예덕선생전」을 보면, 엄행수라는 거름 장수 이야기를 다루면서, 그의 거름을 쓴 밭 주인들이 해마다 육천 냥이라는 거금을 벌여 들였다고 전합니다.      

 이렇게 돈을 번 사람들은 양반이라는 지위에도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자기 대에 바로 벼슬을 살지는 못하더라도, 일단 양반 지위를 사놓으면, 후손이라도 벼슬을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우리도 언젠가 저런 으리으리한 명문가 가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이게 조선 후기 아무 쓸모도 없는 공명첩이 팔리는 이유였습니다.      

 자, 이리하여 조선 후기 양반들의 수는 점점 늘어났습니다. 양반은 사회적으로 기득권층에 해당했지만, 세금은 내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양반들에게 ‘청빈’의 미덕을 강조하였으니, 나라가 세금을 걷는 것 또한 가당치도 않다는 논리였지요. 물론 정작 청빈한 양반은 없다시피했지만 말입니다. 그러니 양반들이 늘어날수록 나라는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반들 말에 의하면 양반은 훌륭한 사람들인데, 이 훌륭한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오히려 나라는 가난해지고, 사회는 혼란스러워집니다.      

 박지원의 「양반전」은 이러한 상황, 더 이상 양반이 훌륭한 사람이 아닌 상황에서 출발합니다. 다만 그의 소설에는 발칙한 상상력 딱 하나가 추가됩니다. 양반이 공명첩을 통해 점차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차라리 양반이라는 지위를 시장의 물건처럼 사고팔 수 있다면? 이 상상을 바탕으로 「양반전」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했던 것입니다.     


‘양반’은 사족(士族: 선비와 그 자손들)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양반을 존중하는 것 같다구요? 그러나 곧이어 양반의 아내는 심지어 양반을 이렇게 욕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당신이 한평생 글 읽기를 좋아했으면서, 관가의 환곡을 갚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구려. 쯧쯧, 양반 양반 하더니 어디 한 푼어치도 못 되는구먼.”

   

 ‘양반’이라는 단어를 ‘한 냥의 반’으로 읽은 언어유희입니다. 조선의 화폐 단위를 살펴보면, 10푼이 1전, 10전이 1냥입니다. 그러니 ‘한 냥의 반’이라면, 5전 또는 50푼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양반 스스로 만들어내는 경제적 가치는 한 푼도 되지 않는다는 비아냥입니다.           

 그렇습니다. 물건을 돈 주고 살 때, 언제나 잘 따져보아야 하지 않습니까? 양반이 사고 팔 수 있는 상품이라면, 양반에 대해서도 잘 따져보아야 하는 법입니다. 군수가 보증서를 통해 한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양반이 무엇인지 따져보고 나니 어떻습니까? 알고 보니 ‘양반’은 천 금을 주고 샀음에도 다시 버릴 수밖에 없는, 버려야 하는, 몹쓸 불량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작품을 쓴 박지원은 양반 계층이었습니다. 즉, 「양반전」은 박지원의 발칙한 상상에서 시작한, 양반 계층에 대한 자아성찰이자 통렬한 비판입니다.        


“(양반이라는 것들은)조상 중 한 명이라도 벼슬한 이가 있으면, 漁(고기 어)자와 魯(노나라 노)자도 구분하지 못하면서 쟁기도 보습도 쥐지 않는다. 처자식은 굶주려 아우성을 쳐도 돌아보지 않고 무릎 꿇고 앉아 성리(性理: 인간의 성품과 자연의 이치)만 이야기한다.”

                                                                             서유구, 「임원경제지」      


 이 작품을 다시 읽으면, 재미있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군수입니다. 군수가 보증서에서 늘어놓는 내용을 보면, 양반의 장단점은 물론이요, 그 허세와 위선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군수가 부자에게 하는 말을 보면, 군수는 양반이란 모름지기 어때야 하는지, 그 비전까지 제시하는 인물입니다.

     

“부가 있으나 아끼지 않으니 정의롭고, 남의 어려움을 돌보니 어질다. 낮은 것을 꺼리고 높은 것을 바라니 슬기롭다.”     


 이것이 박지원이 생각한 사회 기득권층의 의무입니다. 부를 아끼지 않고, 남의 어려움을 돌봐야 합니다. 도덕적으로 타락하는 것을 꺼리고 끊임없이 높은 도덕적 가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소설에 이렇게 썼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조선 후기에는 이러한 양반들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요?     

 한 차례, 나라를 뒤흔든 선거가 끝났습니다. 그리고 또 나라를 뒤흔들 다른 선거가 남아있지요. 저는 선거철마다 항상 「양반전」을 떠올리곤 합니다. 선거에 나오는 이들, 어떤가요? 가장 낮은 머슴을 자처하지만, 정작 이들의 행태는 스스로 하늘이 낳은 백성 중 ‘가장 존귀한 이’를 자처하는 양반이 아니던가요?

 이 양반들의 모습이 과연 군수의 말에 담긴, 정의롭고 어질며 슬기로운 양반에 가까운지, 아니면 군수의 보증서에 담긴 위선적인 양반에 가까운지는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물론 이 양반들이 선거판에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여러분들 누구나, 이 사회 곳곳에서 거드름을 피는, 일명 ‘양반’들의 얼굴을 떠올리실 수 있을 겁니다. 글쎄요, 군수의 보증서 첫 문장처럼, 오늘날의 ‘양반’들 또한 역시 이름이 여러 개인 모양입니다.

     

아직도 「양반전」의 가르침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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