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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Dec 27. 2023

한 영화배우의 죽음

확인도 되기 전에 낙인부터 찍는 사회

“타인을 ‘인간 취급하지 않기’를 서슴지 않으면서, 혀가 칼이라는 인식을 잊어버린 채, 그리고 언어가 존재를 규정한다는 말이 딱 어울리게도 자기 자신이 칼이 되어버린 어떤 문화가 있는 듯하다.”
(…)
“인간의 이해력이 가장 필요한 지점도 사실은 이분법 가운데 제3지대를 발견하는 데 있다. 적과 아군의 구별은 단세포생물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고등동물일수록 이해에 기반을 둔 타협, 화해, 제3의 길로 나아갈 여지가 늘어난다.”

-정지우, 『내가 잘못 산다고 말하는 세상에게』, 한겨레출판, 2022, 48쪽, 55쪽에서



어떤 ‘논란’이 있을 때 연예인은 대부분 인기가 많을수록 더 약자가 된다. 대중들 앞에 선다고 일상이 전적으로 화려하지도 않다. 어떤 이가 돈을 많이 벌었거나 혹은 그렇게 보인다고 해서 그의 사생활이 무방비로 노출되어도 좋다는 건 틀린 생각이다. 그들은 ‘관심’을 먹고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의 재능을 가지고 일을 해서 먹고사는 직업인이다. 직업을 가진 모두가 그러하듯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누구 하나쯤 죽어도 조금의 성찰도 하지 않는 사회가 된 지 오래인 것 같다. 혐의가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에 의해 ‘사실’로 확인되기도 전에 진술 내용 하나하나가 자극적으로 기사화되고, 녹취록을 공개한 어느 유튜브 채널은 자신의 '저격' 대상이 된 이의 사망 소식이 공식화된 뒤에도 자신들이 승리(?)할 것이라며 당당하다. 죽음 그 자체를 애도하는 이의 소셜미디어 게시물에 어떤 사람들은 굳이 찾아가서 정제도 배려도 없는 욕설과 비난을 쏟아낸다. 그들에게 연예인은 오직 공격당하거나 소비되는 사냥감에 불과하다.


위법한 행위나 당대의 사회윤리적 가치관에 반하는 행위를 누군가 했다면 그에 맞는 처벌을 받거나 조치가 취해질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누군가를 미리부터 낙인찍고 무분별하게 비난하며 행적과 발언을 들추고 박제하는 행위마저도 정당화해 줄 수는 없다.


“더 이상 타인의 의도를 선해해 줄 여유도 아량도 없게 된 사회”라는 이야기를 읽은 적 있다. 적어도 내가 알고 겪는 오프라인에서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온라인 공간은 이미 오래전부터 다채롭고 복잡다단한 ‘배경’과 ‘맥락’에 대한 이해의 노력에 앞서 오직 어떤 단어들만이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예컨대 공격, 저격, 재단, 낙인, 그런 것들. 그 세상에는 낙인찍힌 사람들과 그것을 즐기는 이들만이 존재한다. (2023.12.27.)



아래는 2019년 5월에 썼던 글_


타인에게 본인에게는 적용하지 않을 엄격하고 철저하고 완전무결한 도덕적 잣대를 강요하는 일. 연예인의 말과 행동을 샅샅이 심판하는 글자들을 볼 때면 내 일도 아닌데 마음이 아프게 된다. 본인 생각과 요구만 중요하고 마치 그 연예인이 인격체가 아니라 소비재인 것처럼 대하는 글자를 볼 때, 과연 그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언어가 맞는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아무리 덧글이 가볍디 가벼운 것이라 해도.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사람이 자신의 언행에 그만큼 더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는 것도 맞지만, 팬이라고 해서 다 요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연예인은 대중을 상대로 언제나 을이다. 그것도 철저하게. 어쩌면 한 번의 실수조차 허용하지 않는 사회의 연장선일지도 모르겠다. 삶에 여유가 부족하다 해서 사람에의 관용까지도 경시되어야 하는가. 연예인과 대중의 관계에 대해서 더 생각하게 만든다.


(사진: 허지웅, 『버티는 삶에 관하여』(문학동네, 201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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