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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다해 May 21. 2024

회계왕이 되는 그날까지!

비전공 회계담당자의 고군분투기


작년 9월, ESC에 합류하면서 회계 업무를 맡게 되었다. 학부에서 물리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통계물리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숫자 정도는 쉽게 다루리라 생각했다. 회계는 단순히 숫자 계산의 영역은 아니었다. 돈의 카테고리를 나누는 일이었다. 어떤 카테고리가 적합한지 결정하는 일은 가치판단의 영역이다. 회계에 문외한인 나는 흔히 사용되는 카테고리를 익히기도 해야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렇게 나눈 카테고리를 회계 시스템에 어떻게 입력하는 건지 이해하는 게 급선무였다.



가장 친숙한 회계로는 용돈 기입장이나 가계부를 예로 들 수 있다. 수입과 지출을 일렬로 쓰고, 매일 혹은 매월 잔액을 표기한다. 이러한 방식을 단식부기라고 한다. 단식부기에서는 숫자를 기록하는 열이 하나뿐이다. 전문적인 회계 영역에서는 복식부기를 사용한다. 단식부기와는 다르게 숫자를 기록하는 열이 두 개 있다. 각 열을 차변과 대변이라 부른다. 기본적으로 차변과 대변의 합이 같아야 한다. 거기까지는 알겠는데, 그래서 이렇게 나누어놓은 게 전체 회계의 흐름에서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통 모르겠는 일이었다.



ESC 사무국이 자리한 공유오피스에는 다른 비영리 조직들도 많다. 비영리 조직에서 회계를 맡은 분들은 대부분 회계를 전공하지 않았다. 비영리보다는 규모가 작은 조직이 겪는 어려움이라고 해야 더 알맞겠다. 회계를 알지 못하고 당장 눈앞에 닥친 일을 처리해 나가다 보니, 매번 혼란의 연속이었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라는 존재를 알지 못하고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비슷한 문제의식을 느낀 사람들을 모아, 비영리 회계 스터디 모임을 만들었다. 캐치프레이즈는 ‘대변과 차변이 무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회계왕이 되어보자!’



같이 공부할 책을 한 권 정했다. 분량을 정해 각자 읽고,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엇이 인상깊었는지, 무엇이 재미있었고, 무엇을 내가 알게 되었는지 등을 나눴다. 누구 한 명의 전문가를 따라가기보다는, 각자가 의견을 나누는 책모임처럼 진행되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각자 일하고 있는 단체의 특성을 알 수 있었고, 다른 단체와 비교하며 내가 속한 단체를 보다 더 이해할 수 있기도 했다. 비영리단체가 공동으로 해야 하는 일들의 시기를 놓치지 않게 서로 알려주고, 조금 더 아는 사람이 도와주기도 했다. 책을 등불 삼고 서로를 동료 삼아 회계왕이 되기 위해 한 걸음씩 내디뎠다.



그렇게 더듬더듬 익혀가다 보니 결국 최초의 의문점이었던 대변과 차변과 더불어 전체적인 회계의 흐름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스스로 너무나 뿌듯했고, 스터디원들에게 내가 이해한 바를 설명해 주기도 했다. 한 스터디원은 지난 10개월간 알고 싶었으나 이해하지 못했던 바를 이해하게 되었다며 고마워했다. 이렇게 스스로 인정할 만큼의 목표를 달성하던 차에, 공유오피스에 있는 마법사급의 회계 전문가에게 재무제표 읽기 특강을 들을 기회가 생겼다.



특강에서는 청중들이 다들 어느 정도 기초 지식이 있다고 가정했다. 기초적인 지식을 설명하기보다는 회계 담당자가 생각해 봤으면 좋겠는 부분을 이야기해 주셨다. 바로 현금 흐름을 좇다 보면 회계 흐름을 놓칠 수 있다는 점이다. 회계 흐름은 조직 운영에 필요한, 특히 대표에게 필요한 시각이라고 했다. 2월에 회계 일을 전담하게 되면서, 매월 결산 내용을 회원들에게 알리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회원들에게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보여줘야 할 회계가 있을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책을 보며 하나하나 따라갈 때는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하던 시각으로 회계를 바라보게 되었다.



다른 한편, 특강을 들으며 내가 회계일이 익히면서 갖게 된 회의감에 대한 답도 얻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회계 일이 어렵게 느껴졌지만, 막상 차근차근히 하다 보니 어느 정도 파악이 되었고 익숙해졌다.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매너리즘에 빠졌다. 별다른 어려움이 없자 금세 흥미가 시들해졌다. 회계가 어떤 조직을 볼 수 있는 눈이고, 의사결정에 참고할 만한 자료가 되는 거라고 하는데 별로 와닿지 않았다. ESC의 활동을 기록할 뿐이었고, 수입과 지출이 단순하고 규모가 작은 조직인데 어떻게 회계가 판단의 기초가 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나의 고민을 들은 회계 마법사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선 회계의 목적은 모든 것을 화폐의 가치로 표현하는 일이라고 했다. 1단계는 현금 입출금 내용을 기록하는 일이지만, 그다음 단계가 되면 현금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것들이 가지는 화폐가치를 파악해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인적자원을, 월급을 주는 지출의 항목으로 보는 것이 아닌 회사가 가진 자산의 관점에서 본다. 카테고리 분류에 사용되는 기준은 비영리/영리와 같은 분야 또는 국가, 국가 연합체와 같이 범위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러한 회계 기준이 적용되는 범위가 넓어지면 이런 추상성의 단계가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내가 가진 고민은 지금의 회계 단계가 수입과 지출을 기록하는 수준이라서 그렇다고 했다. 꼭 필요한 일이고 회계를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다음 그리고 또 그다음의 단계가 있다고 알려줬다. 더 나아가서 비영리 법인에 중요한 것은 어쩌면 임팩트를 화폐가치와 하는 일이라고 했다. 임팩트 측정과 회계가 이렇게 맞닿아 있을 수 있구나 싶었다. 조금 더 나아가서는 회계와 물리학의 접점도 발견했다. 물리학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찰하면서 이를 수치화하고, 수치들의 관계와 의미를 탐구한다. 전혀 관계가 없어 보였던 물리학과 비영리, 회계가 이렇게 맞닿아 있다는 점을 발견하자 희열이 느껴졌다.



지금 공부하고 있는 책은 약 1/3의 분량이 남아있다. 나머지 부분은 세금에 관한 내용이다. 대변과 차변을 넘으니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이 세금도 극복하고 나면 다음 단계로는 사회적 회계라는 주제를 공부해 보려 한다. 작년에 살며시 구상해 보았던 ESC의 임팩트 체인을 마음 한편에 품고, 사회적 회계를 공부하며 좀 더 구체화해 보아야겠다.


회계왕이 되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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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노다해(https://linktr.ee/dahae.roh)


대학원에서 통계물리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사단법인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 Engineers and Scientists for Change) 사무국에서 일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 과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인 사단법인이다. 주로 회계/세무를 담당하지만, 사무국 규모가 작아 거의 모든 일에 손을 대고 있다. 부캐로는 과학커뮤니케이터로 활동한다. 과학 강연, 과학 글쓰기, 과학책 번역을 하고, 과학 타로도 만든다. 과학과 과학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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