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그날 밤, 아이는 처음으로 선택되었다

이름을 불러준 사람

by Helia

하린은 책장을 넘기다 말고 손끝에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글자는 분명 눈앞에 있었지만, 문장 사이로 다른 풍경이 스며들었다. 방 안은 조용했고 창밖에서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멀어져 가고 있었는데도, 하린의 마음은 자꾸만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열 살이 된 하린은 장난감을 오래 붙들고 노는 아이가 아니었다. 대신 책을 읽는 시간이 길었다.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는 느렸고, 그림이 있는 부분에서는 더 오래 멈췄다. 등장인물의 표정이나 구름의 모양 같은 사소한 것을 오래 바라보다가, 문득 다시 앞장으로 되돌아가기도 했다. 이야기를 따라가기보다는 이야기 속에 머무는 쪽이 더 익숙한 아이였다.

하린은 책을 조심스럽게 덮었다.
덮는 순간, 마치 그 사이에 끼어 있던 숨이 빠져나오듯 가슴이 한 번 가볍게 울렸다. 예전 같았으면 그 울림이 통증으로 이어졌겠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았다.

꿈은 여전히 꾸었다.
다만 어째서인지 예전만큼은 아프지 않았다. 꿈속에서 무엇인가가 스쳐 지나가도 몸이 크게 휘청거리지 않았고, 식은땀에 젖어 울며 깨는 일도 거의 없어졌다.

하린은 이제 혼자 자도 무방했다.
금희는 방문을 반쯤 열어두고 거실 불을 늦게까지 켜두는 것으로 밤의 안전을 대신했다. 하린은 혼자 침대에 누우면 이불을 가지런히 당겨 올리고, 손을 가슴 위에 얹은 채 숨을 고르는 습관이 생겼다. 꿈이 와도, 통증이 스치더라도, 끝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처럼.

책을 덮은 하린은 연필을 꺼냈다.
말 대신 선을 긋는 건 어릴 때부터의 버릇이었고, 요즘 들어서는 더 자주 그 버릇이 찾아왔다.

종이를 펼치자 연필 끝이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처음에는 풀처럼 보이는 짧은 선들이었고, 그다음에는 울타리처럼 길게 이어진 선이 나타났다. 그 선 너머로 낮은 지붕이 그려졌고, 지붕 옆으로 또 하나의 작은 건물이 붙었다.

하린은 자신이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그릴수록 마음이 느슨해졌다. 예전의 밤들이 그렇듯, 어떤 감각은 설명으로 잡히지 않고 손끝에서 먼저 드러났다.

하린은 연필을 잠깐 멈추고 종이를 바라보았다.
낯선데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넓게 펼쳐진 들판, 울타리, 낮은 건물, 그리고 그 옆의 공간.

하린은 그 옆의 공간을 조금 더 정성스럽게 그렸다.
문이 있고, 창이 있고, 불이 켜진 것처럼 보이는 작은 방. 그 방을 그리는 동안, 이유 없이 마음이 놓였다.

“오빠는…”

하린은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잘 지내고 있을까.”

질문은 공기 중에서 끝났지만, 불안은 따라오지 않았다.
대신 안도감이 천천히 번졌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하린은 종이 위에 사람 하나를 더했다.
얼굴은 그리지 않았다. 등과 어깨만, 두 손으로 무언가를 들고 있는 모습. 그림 속의 사람은 바빠 보였지만 위태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게 이상하게 중요한 차이처럼 느껴졌다.

하린은 연필을 내려놓고 한 번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 순간 가슴 안쪽에서 아주 오래된 박동이 조용히 이어졌다. 통증이 아니라, 신호처럼.

같은 시간, 다른 나라의 아침 공기 속에서 하준은 장화를 신고 목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열 살이 된 하준은 또 한 번 거처를 옮긴 뒤, 이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번 집에서는 누구도 하준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거나 이유 없이 손을 올리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분명한 조건이 있었다. 일을 잘해주는 조건으로 공부도 시켜주고, 먹고 자게 해주는 것.

방은 목장 근처 창고였지만 갖출 건 갖춰진 하준의 방이었다.
작은 침대와 책상, 의자, 전등, 바람이 직접 들이치지 않게 손본 창문. 창고 특유의 냄새가 희미하게 배어 있어도 하준은 그 공간이 싫지 않았다. 문을 닫으면 혼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밤은 훨씬 견딜 만했으니까.

하준은 물통을 옮기고 울타리를 살피고 헛간 문을 여는 일을 순서대로 해내는 동안, 머릿속이 조용해지는 걸 좋아했다. 몸이 바쁘면 생각이 잠잠해졌고, 생각이 잠잠해지면 과거도 조금 덜 선명해졌다.

그런데 그날은 시작부터 어딘가 달랐다.
늘 먼저 나와 있던 목장 주인의 트럭이 보이지 않았다.

하준은 잠시 멈추었다가 헛간을 지나 집 쪽으로 걸어갔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평소라면 닫혀 있을 문이었다.

하준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대신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목장 주인이 쓰러져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쥔 채 숨을 얕게 몰아쉬고 있었다.

하준은 무릎을 꿇고 가까이 다가갔다.
숨은 있었지만 고르지 않았다.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있었다.

하준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손은 떨리지 않았다.

“911.”

연결음이 들리자 하준은 또렷하게 말했다.
주소를 말하고, 상황을 설명했다. 쓰러진 시간을 정확히 모른다는 것도, 지금 상태가 어떤지도 빠르게 전했다.

전화기 너머의 지시에 따라 하준은 목장 주인의 몸을 움직이지 않게 했고, 곁을 지키며 숨을 계속 확인했다. 시간은 길게 늘어지는 것 같았지만 하준은 눈을 돌리지 않았다.

사이렌 소리가 들렸을 때, 하준은 그제야 숨을 크게 내쉬었다.

“You did really well.”

구급대원의 말은 칭찬이라기보다 확인처럼 들렸다.

병원에서 의사는 말했다.
협심증이라고. 조금만 늦었어도 생명이 위험했을 거라고.

그 말이 끝났을 때, 하준의 가슴 안쪽이 뜨거워졌다.
두려움도 긴장도 아닌, 뿌듯함이었다. 자신이 거기 있었기 때문에 한 사람이 살아 있다는 감각.

며칠 뒤, 목장 주인은 돌아왔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하준을 불러 세웠다.

“네가 날 살렸다.”

잠시 말을 멈춘 뒤, 숨을 고르듯 말했다.

“정말… 고맙다.”

“이제 더 이상 창고에서 지내지 않아도 돼.”

“너만 괜찮다면 내가 너의 후원자가 되어줄 생각이야.”

“앞으로는 공부만 열심히 이 집에서 지내면 된다. 편하게.”

잠시 망설이다가, 그는 덧붙였다.

“아저씨 말고, 삼촌이라고 불러도 좋아.”

“너는 어떠니?”

하준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고개를 숙인 채 손을 꼭 쥐었다. 낯선 감정이 목까지 차오르는 걸 느끼면서도, 처음으로 누군가의 선택이 두렵지 않았다.

“네.”

그날 이후, 하준의 밤은 달라졌다.
문을 닫고 잠들 수 있다는 확신. 그 확신은 아이의 몸에 남아 있던 오래된 경계를 조금씩 풀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멀리서,
같은 순간에
누군가도 연필을 내려놓고 숨을 고르고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조용히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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