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부르지 않아도 남아 있는 것

남아 있는 쪽의 침묵

by Helia

해윤은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사랑이 시작된 게 아니라
이미 대가를 치르기 시작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시간은,
다시 한번 그녀에게서 무언가를 가져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준비는 늘 조용했다. 예고도, 신호도 없이 삶의 틈으로 스며드는 방식. 해윤은 형광등 아래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오른쪽 귀의 침묵은 이제 낯설지 않았다. 공포는 지나갔고, 그 자리에 남은 건 경계였다. 무엇을 잃었는지보다, 다음에 무엇이 사라질지에 대한 감각이 더 또렷해졌다.
해윤은 손 안의 USB를 내려다봤다. 작은 금속 조각 하나가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너무 작아서, 그래서 더 잔인했다. 무언가를 이렇게 간단한 형태로 남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안에 사람의 시간과 감정을 밀어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몇 번이나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이름을 떠올렸다. 이헌. 아직 있었다. 얼굴을 상상했다. 원래부터 없었기에 상실은 없었다. 대신 감정의 온도를 떠올려 보려 했을 때, 손끝이 허공을 더듬는 느낌이 들었다. 따뜻했는지, 아팠는지, 아니면 그 둘이 섞여 있었는지. 정확히 잡히지 않았다.
현관문을 닫는 소리는 왼쪽에서만 울렸다. 익숙한 집이었다. 같은 신발장, 같은 냄새, 같은 조명. 그런데 어딘가가 달랐다. 해윤은 그 차이를 바로 말로 만들지 못했다. 말이 되는 순간, 시간은 또 다른 값을 요구할 것 같았다.
책상 위에 USB를 올려두고 한참을 바라봤다. 내려놓는다는 행위 하나에도 선택이 따른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었다. 해윤은 노트북을 켰다. 화면이 켜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빛이 번지는 속도로 충분했다. USB를 꽂는 순간, 미세한 진동이 손끝을 스쳤다. 연결이라기보다는 확인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폴더는 하나뿐이었다. 이름 없는 폴더. 클릭하자 텍스트와 음성이 뒤섞인 기록들이 나타났다. 정리되지 않은 시간의 파편들. 날짜 대신 ‘잔존’이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있었다. 해윤은 첫 번째 파일을 열었다.
— 음성 복원 12차.
— 감정 반응 없음.
— 그러나 피험자는 ‘그리움’을 정확히 발화함.
그리움.
해윤의 눈이 그 단어에서 멈췄다.
“이헌이… 이런 말을 했어?”
혼잣말은 방 안에 가라앉았다. 대답은 없었지만, 그녀는 문장 사이에서 서린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기록은 감정을 배제한 척했지만, 문장 사이에는 분명 망설임이 남아 있었다. 과학자의 문장이 아니라, 누군가를 끝까지 놓지 못한 사람의 기록이었다.
다음 파일에는 영상이 담겨 있었다. 실험실. 경고등. 시계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서 있던 서린. 살아 있었을 때의 모습. 해윤은 숨을 멈췄다. 화면 속 서린은 지금보다 훨씬 피곤해 보였고, 동시에 단단해 보였다. 이미 결정을 끝낸 사람의 얼굴이었다.
“이건… 함정이야.”
영상 속 서린이 말했다. 카메라를 향한 말이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하는 확인에 가까웠다.
“알고 있어.”
잠시 침묵.
“그래도 해야 해.”
그녀는 콘솔 앞에 서 있었다. 손은 떨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화면에 이헌의 음성 파형이 떠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서 떼어온 흔적처럼 보이는 파형.
“이 목소리를 완성하면,”
서린이 낮게 말했다.
“적어도 한 사람은 살아.”
그 말이 끝나자 화면이 흔들렸다. 경고음. 누군가 외부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표시. 해윤은 손으로 입을 막았다. 다음 장면을 보기 전에 이미 알 수 있었다. 도망칠 수 있었을 거라는 것, 그러나 도망치지 않았을 거라는 것.
영상은 갑자기 끊겼다. 검은 화면 위로 문장이 하나 떴다.
— 기록 종료.
해윤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서린의 선택이 머릿속에서 천천히 정리되고 있었다. 누군가가 파놓은 함정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안으로 들어간 이유.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남기기 위해서였다는 걸.
그때 스피커에서 아주 낮은 숨소리가 들렸다. 소리라기보다는 공기의 움직임에 가까웠다.
“… 해윤.”
이번에는 서린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헌이었다. 그러나 실험실에서 들었던 것과도 달랐다. 더 희미했고, 더 멀었다.
“지금은… 너무 많이 보면 안 돼.”
해윤은 눈을 감았다.
“이미 늦었어.”
그녀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나, 벌써 느끼고 있어.”
“뭘.”
“빠져나간 자리.”
이헌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침묵은 그녀가 잘 아는 종류의 침묵이었다. 미안함과 포기가 섞인 숨.
“… 시작됐구나.”
그 말은 확인이었다.
“응.”
해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꿈을 떠올리려 했는데, 예전만큼 아프지 않아.”
“그건—”
“알아.”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아픈 걸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거지.”
방 안의 공기가 다시 무거워졌다. 실험실의 밀도와 닮은 압박. 해윤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숨을 고르게 쉬었다.
“그래도.”
그녀가 말했다.
“지금은 아직… 네가 있어.”
이헌의 숨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그게 더 위험해.”
“그래도 괜찮아.”
해윤은 USB를 가슴께에 쥐었다.
“이번엔 내가 선택한 거니까.”
대답은 오지 않았다. 대신 화면에 문장이 하나 떠올랐다. 자동 실행처럼, 그러나 분명 누군가의 의지가 개입된 흔적이었다.
— 감정 기억 절삭 진행 중.
— 대상 : 꿈, 그리움, 반복된 호출.
해윤은 화면을 바라보며 웃음처럼 숨을 흘렸다.
“정확하네.”
그녀는 손을 뻗어 화면을 껐다. 더 읽지 않겠다는 선택. 더 잃지 않겠다는 약속. 지금의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대신 기억들이 하나씩 스쳐 지나갔다. 스무 살의 밤, 설명할 수 없는 눈물, 이름 없는 그리움. 그 감정들이 이제는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해윤은 또렷하게 느꼈다.
그리고 그게 가장 무서웠다.
눈을 감은 채, 그녀는 속으로만 말했다. 소리도, 호출도 없는 방향으로.
기다려.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완전한 침묵도 아니었다.
시간은 이미 그녀의 곁에 와 있었고,
다음 것을 집어 들기 직전의 손을
아직 거두지 않은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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