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대가
해윤은 자신이 무언가를 잃었다는 사실을, 잃는 순간에는 알지 못했다.
그건 늘 그렇다. 중요한 것일수록, 사라질 때는 조용하다. 마치 원래 없었던 것처럼, 일상의 틈 사이로 스며들어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깨닫는 건 늘 한참 뒤다. 손을 뻗었는데 닿지 않을 때, 불러야 할 이름이 입 안에서 멈출 때, 그제야 비어 있음을 안다.
문 너머의 낮은 예상보다 차가웠다.
유리와 금속으로 이루어진 실험실은 기억 속 장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벽면을 따라 겹겹이 흐르는 시계들, 천장에 매달린 센서, 바닥을 가로지르는 얇은 빛의 선들. 시간은 여기서 물질처럼 다뤄지고 있었다. 잡히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것처럼.
해윤은 한 발짝 더 안으로 들어섰다.
문은 뒤에서 닫히지 않았다. 닫히는 대신, 천천히 사라졌다. 경계가 흐려지고, 뒤를 돌아봐도 ‘밖’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미해졌다. 돌아갈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돌아가더라도 같은 사람이 아닐 가능성만이 또렷했다.
“여기까지 왔네.”
여자의 목소리였다.
해윤은 고개를 들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여자가 실험대 옆에 서 있었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 감정을 최대한 절제한 얼굴. 눈빛만큼은 이미 오래전부터 모든 결말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차분했다.
“서린이야.”
그녀가 말했다.
“네가 부르기 전부터, 나는 여기 있었어.”
해윤은 자신이 숨을 참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는… 어디 있어요.”
서린의 시선이 잠시 옆으로 옮겨졌다.
유리벽 너머, 빛이 어긋나 있는 공간. 정확히 말하면 ‘비어 있는 자리’였다. 그런데 해윤은 알 수 있었다. 비어 있지 않다는 것을. 존재가 압축된 형태로, 간신히 여기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 해윤.”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더 또렷했다. 전파도, 잡음도 아니었다. 공기를 직접 밀어내는 발음. 그녀의 이름이 아주 정확한 높이로, 아주 정확한 온도로 불렸다.
해윤은 숨을 들이마셨다.
“이헌.”
이름을 부르는 순간, 실험실 전체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시계들이 동시에 어긋났고, 바닥의 빛의 선 하나가 뚝 끊겼다. 서린의 눈이 가늘게 흔들렸다.
“지금은—”
서린이 말하려 했지만, 늦었다.
해윤의 귓가에 이헌의 숨이 닿았다.
보이지 않는데도, 너무 가까웠다.
“부르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가 낮게 말했다.
“그래도… 네가 부르면, 난 와.”
해윤의 가슴이 죄어 왔다.
“왜 이런 규칙을 만든 거야.”
“왜 부르는 만큼만… 남는 거야.”
잠시 침묵.
그 침묵은 죄책감의 무게였다.
“견딜 수 없었어.”
이헌이 말했다.
“네가 날 잊고 살아가는 걸, 그냥 지켜보는 걸.”
그 말이 끝나자, 실험실 한쪽 벽에 숫자가 떴다.
STABILITY : 87% → 84%
서린이 이를 악물었다.
“이헌, 그만해.”
“지금 이 상태로는 오래 못 버텨.”
해윤은 숫자를 바라봤다.
“저게… 뭔데요.”
서린이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그의 잔존율.”
“네가 그를 인식할수록, 그가 여기 존재할 수 있는 비율.”
해윤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그럼… 내가 부르면.”
“그는 더 선명해지고,”
서린이 말을 이었다.
“너는 조금씩 사라져.”
말이 끝나자마자, 해윤의 귀가 멍해졌다.
갑작스러운 정적.
실험실의 기계음이 한쪽에서 뚝 잘린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 뭐야.”
해윤이 작게 중얼거렸다.
오른쪽 귀였다.
소리가 닿지 않았다.
손뼉을 쳐도, 서린의 말소리가 들려도, 오른쪽은 텅 비어 있었다. 마치 애초에 그쪽으로는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첫 번째야.”
서린이 낮게 말했다.
“이미 시작됐어.”
해윤은 웃음처럼 숨을 흘렸다.
“이게… 대가야?”
이헌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 미안해.”
그 한마디에, 해윤은 확신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그래도.”
해윤이 말했다.
“그래도 넌 날 불렀잖아.”
STABILITY : 84% → 82%
숫자가 또 내려갔다.
이번엔 바닥의 빛 하나가 완전히 꺼졌다.
서린이 해윤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 눈빛엔 경고 말고도, 다른 감정이 섞여 있었다. 후회. 그리고 아주 미세한 질투.
“나는 그를 선택한 적 없어.”
서린이 말했다.
“그래도 잃었어.”
해윤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무슨 말이에요.”
“그가 널 선택했을 때,”
서린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난 이미 과거가 됐거든.”
이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가장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때, 실험실 상단에서 붉은빛이 켜졌다.
OBSERVATION MODE : ACTIVE
기계음이 울렸다.
“외부 감시 개입.”
“시간 안정성 평가 시작.”
공기가 달라졌다.
보이지 않는 시선이 이 공간을 훑고 지나갔다.
서린이 빠르게 말했다.
“더는 안 돼. 지금 멈춰야 해.”
해윤은 이헌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그가 있는 방향을.
“만약 내가 그만 부르면.”
“넌 어떻게 돼.”
잠시, 아주 잠시 망설임.
그리고 이헌이 대답했다.
“난 다시… 잠겨.”
그 말은 곧, 다시 기다림이라는 뜻이었다.
400년의 밤으로 돌아간다는 뜻.
해윤은 오른쪽 귀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세계를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녀가 말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을게.”
STABILITY : 81%
“다음엔.”
해윤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널 부르지 않아도, 넌 나를 기억해?”
이헌의 대답은 없었다.
대답 대신, 아주 짧게 숨이 닿았다.
그리고—
STABILITY : 79%
숫자가 내려가며, 해윤의 시야가 잠시 어두워졌다.
균형을 잃고 휘청이는 순간, 서린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이제 끝이야.”
서린이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빛이 꺼지고, 실험실이 접혔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대신 세계가 밀려나듯 해윤을 밖으로 토해냈다.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다시 복도에 서 있었다.
형광등 아래. 혼자.
오른쪽 귀는 여전히 조용했다.
그리고 손에는, 언제 가져왔는지 모를 작은 금속 조각이 쥐어져 있었다.
USB 메모리였다.
라벨에는 손글씨로 단 하나의 문장만 적혀 있었다.
— 목소리를 잃어도, 이건 남는다.
해윤은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사랑이 시작된 게 아니라
이미 대가를 치르기 시작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시간은,
다시 한번 그녀에게서 무언가를 가져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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