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이름을 부르는 순간, 세계가 흔들렸다

by Helia

400년의 시간이, 단 한 번의 울림으로 무너졌다.
해윤은 재생 버튼에서 손을 떼지 못한 채 그대로 서 있었다. 구조물 안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이미 끝났는데, 방 안의 공기는 아직 그 문장을 붙잡고 있었다. 숨을 들이쉬면 오래된 녹음의 잔향이 함께 폐로 들어왔고, 숨을 내쉴 때마다 과거의 공기가 섞여 나오는 기분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현재인지, 아니면 아주 늦게 도착한 과거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 해윤.”
이번에는 녹음이 아니었다.
스피커를 통하지도 않았다.
공기 자체가 울렸다.
해윤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구조물 안, 공기가 모여 있던 자리에서 희미한 윤곽이 서서히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완전한 실체는 아니었다. 빛과 그림자가 어긋난 경계, 사람의 외형만을 간신히 유지한 채 흔들리는 존재. 하지만 해윤은 그 순간 확신했다. 이건 환각이 아니었다. 꿈도 아니었다. 너무 오래, 너무 정확하게 자신을 알고 있는 시선이었다.
심장이 세게 뛰었다.
놀랍게도 두려움보다 먼저 올라온 건 안도였다.
“너무… 빨리 들었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 웃음이 섞여 있었지만, 그 웃음은 기쁨보다는 망설임에 가까웠다. 해윤은 입술을 떼지 못한 채 그를 바라봤다. 얼굴은 여전히 선명하지 않았지만, 눈빛만은 분명했다. 꿈속에서 늘 자신을 바라보던 그 눈빛. 꿀처럼 따뜻했고, 동시에 오래된 슬픔이 깔려 있었다.
“빨리?”
해윤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스무 살 때부터 기다렸어.”
그 말에 공기가 한 번 흔들렸다. 마치 공간이 잠깐 숨을 멈춘 것처럼. 그는 한 발짝 다가온 것처럼 느껴졌다. 거리는 숫자가 아니라 감각의 문제였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웠다. 그러나 여전히 닿을 수는 없었다.
“기다린 건… 나야.”
그가 낮게 말했다.
“너는 살았고, 나는 남았으니까.”
그 문장은 고백이었고 동시에 판결처럼 들렸다. 해윤의 가슴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서린이 뒤쪽에서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콘솔을 보며 낮게 말했다.
“연결 안정도가 한계야. 지금 이상 이어지면 해윤의 현재가 먼저 무너져.”
“무너진다니.”
해윤이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어떻게?”
서린은 잠시 말을 고르다, 결국 솔직하게 내뱉었다.
“네 일상 중 하나가 사라져. 인간관계일 수도 있고, 기억일 수도 있고… 아니면 네 몸일 수도 있어.”
그 말이 방 안에 떨어지자, 해윤의 심장은 반사적으로 더 세게 뛰었다. 위험이 구체화되는 순간이었다. 막연한 경고가 아니라, 잃을 수 있는 것의 목록이 제시되는 순간.
“그래도.”
해윤은 시선을 다시 그에게 돌렸다.
“이건 내가 선택한 거야.”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계산이 아니었다. 여전히 그녀를 먼저 두는 사람의 망설임이었다.
“선택에는 대가가 있어.”
그가 말했다.
“기억은 돌아오지만, 예전 그대로는 아니야. 네가 나를 다시 알게 되면… 너의 세계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아.”
“안전했던 적 없어.”
해윤은 고개를 저었다.
“스무 살 이후로 단 한 번도.”
그 말에 그의 숨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마치 처음으로, 자신이 남긴 흔적의 무게를 다시 느끼는 사람처럼.
“그게 내가 원한 방식이야.”
그가 낮게 말했다.
“네가 견딜 수 있도록, 조금씩.”
해윤의 가슴이 아프게 조여 왔다.
“왜 그렇게까지 했어.”
눈가가 뜨거워졌다.
“왜… 혼자서.”
그는 손을 들었다. 불완전한 형태의 손이었지만, 해윤은 그 제스처를 기억하고 있었다. 꿈속에서 늘 그랬다. 더 말하면 버틸 수 없을 때, 항상 그렇게 손을 들었다.
“그때,”
그가 천천히 말했다.
“나는 네가 나를 기억하는 것보다, 네가 살아 있는 게 더 중요했어.”
“그래서 목소리만 남겼어?”
해윤이 물었다.
“얼굴도, 이름도 없이.”
“얼굴을 남기면 넌 돌아왔을 거야.”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이쪽으로. 그럼 둘 다… 사라졌겠지.”
해윤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 공간의 공기는 여전히 무거웠지만, 이제는 견딜 수 있었다.
“그래도.”
해윤이 말했다.
“이번엔 나한테 말해줬어야지.”
그는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그리고 아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짧은 사과였다. 그러나 400년을 건너온 시간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서린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지금 선택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연결이 끊겨.”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감정이 섞여 있었다.
“너는 아직 돌아갈 수 있어.”
“서린.”
해윤이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당신은 이미 잃은 사람이야.”
서린의 표정이 굳었다.
“그래.”
잠시 후, 낮게 덧붙였다.
“그래서 너만큼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 말이 해윤의 등을 한 번 더 밀었다.
“나 아직.”
해윤은 다시 그를 바라봤다.
“네 이름을 안 물었어.”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알고 있어.”
“그래도 이제는.”
해윤의 목소리가 단단해졌다.
“부르고 싶어.”
서린이 숨을 삼켰다.
“해윤—”
그러나 해윤은 이미 결정을 끝냈다. 이름은 정보가 아니라 방향이었다. 감정이 향하는 좌표였다.
“… 이헌.”
그 순간, 실험실의 모든 시계가 동시에 멈췄다. 초침이 공중에서 고정되었고, 그래프의 수치가 얼어붙었다. 공기가 얇게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문이 아니라, 시간 자체가 갈라지는 소리였다.
이헌의 윤곽이 한순간 또렷해졌다. 처음으로, 아주 잠깐, 얼굴의 일부가 드러났다.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눈빛만은 분명했다. 꿈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바로 그 눈빛.
“해윤아.”
그가 말했다. 이번에는 숨을 삼키지 않았다.
“이제 돌아갈 수 없어.”
해윤은 울음 섞인 미소를 지었다.
“알아. 그래도 괜찮아.”
그 순간, 서린의 콘솔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외부 신호 감지.”
서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누군가 이 연결을 보고 있어.”
해윤의 심장이 다시 뛰었다.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동시에 위협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간 감시 프로토콜 가동.”
서린이 이를 악물었다.
“이제부터는… 선택의 대가가 현실로 와.”
이헌은 해윤을 바라봤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가 낮게 말했다.
“네가 날 불러줘서… 고마워.”
시간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전과는 달랐다.
해윤의 현재에는 이제, 잃을 것과 함께
다시 붙잡은 사랑이 있었다.
그리고 그 두 가지는
같은 방향으로 흐르지 않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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