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어떻게, 그를 잊어

기억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돌아온다

by Helia

누군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해윤 역시 멈추지 않고 있었다.
멈추지 않는다는 건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아니라, 무너질 때 바로 주저앉지 않는 일이었다. 해윤은 벽에 기대 선 채, 한동안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눈을 뜨면, 방 안의 윤곽이 천천히 돌아왔다. 책상 모서리, 바닥의 미세한 균열, 커튼 아래로 스며든 도시의 불빛. 이 공간이 아직 자신의 현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관자 쪽이 욱신거렸다. 아주 약한 통증. 처음에는 기분 탓처럼 지나갈 수 있는 정도였다. 해윤은 미간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통증을 밀어내려 하지도 않았다. 대신 가만히 두었다. 통증은 무시하면 사라지는 종류가 아니었다. 무시할수록, 다른 방식으로 존재를 드러냈다.

책상으로 몇 발짝 옮겨 가는 동안, 바닥이 아주 미세하게 기울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중심이 발바닥 아래에서 살짝 어긋났다. 해윤은 손을 뻗어 책상 가장자리를 붙잡았다. 손끝에 닿은 나무의 감촉이 선명했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온도. 현실의 온도였다.

그 순간, 머릿속에 장면 하나가 스쳤다.
빛이 거의 없는 공간. 형체는 있었지만,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라는 사실만 알 수 있을 정도의 윤곽. 그 남자는 늘 그렇게 나타났다. 꿈속에서, 혹은 잠에서 막 깨어난 새벽에. 항상 조금 멀리 서 있었고, 항상 말을 하지 않았다.
해윤은 숨을 멈췄다.

관자 쪽 통증이 한 박자 늦게 깊어졌다. 마치 기억이 표면으로 올라오려다, 두개골 안쪽에 부딪히는 느낌.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눈앞이 잠시 흐려졌다. 시야의 가장자리가 물에 젖은 종이처럼 번졌다.

“괜찮아.”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그러나 말은 아무 힘도 갖지 못했다. 이번에는 문장이 감정을 대신하지 못했다. 통증은 말을 듣지 않았다.
해윤은 책상 옆에 있던 의자를 밀어내려다,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발끝이 바닥을 제대로 찾지 못했다. 무릎이 먼저 꺾였다. 그녀는 바닥에 한 손을 짚고 간신히 넘어지지 않았다. 손바닥에 닿은 차가운 감촉이, 오히려 통증을 또렷하게 만들었다.
다시, 장면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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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되지 못한 마음을 글로 쌓습니다. 기억과 계절, 감정의 결을 따라 걷는 이야기꾼. 햇살 아래 조용히 피어난 문장을 사랑합니다." 주말은 쉬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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