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오후가 천천해진 이유

말을 기다리기보다 손을 믿게 된 오후

by Helia

이날의 오전은,
생각보다 더 빨리 흐르기 시작했다.
오후가 되자, 공간의 속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오전 내내 겹쳐 있던 소리들이 하나씩 정리되듯 사라지고, 남은 움직임만이 또렷해졌다. 종이를 넘기던 손이 잠시 멈췄고, 바쁘게 오르내리던 발걸음도 제자리를 찾았다. 소년은 그 변화를 가장 먼저 느꼈다. 오전에는 손이 먼저 움직였다면, 오후에는 시선이 먼저 움직였다.
문이 열렸다.

이번에는 작은 발소리였다.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문턱에 서 있었다. 키가 낮아 봉투가 얼굴 가까이까지 올라와 있었고, 봉투는 양손으로 꼭 쥐어져 있었다. 종이는 여러 번 접혔다 펴진 흔적이 남아 있었고, 모서리는 손때로 부드러워져 있었다. 아이는 문을 열고도 바로 들어오지 못한 채, 한 발 안쪽에서 멈춰 섰다.

“저기요…”

목소리는 작았고, 끝이 조금 떨렸다.
소년은 반사적으로 루네를 바라봤다. 루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없었다. 이제는 네가 해도 된다는 신호였다. 소년은 카운터 앞으로 나와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몸을 조금 낮추고, 목소리를 낮췄다.
“우편 보내려고 온 거야?”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봉투를 더 꼭 쥐었다.

“응.”

“어디로 가?”

아이는 잠깐 봉투를 내려다봤다가 말했다.

“멀리.”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주소부터 써야 해.”

“천천히 써도 돼.”

소년은 연필을 건네고 한 걸음 물러섰다. 너무 가까이 가지도, 너무 멀어지지도 않은 거리였다.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을 만큼의 여백이었다. 아이는 연필을 쥐고 봉투 위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한 글자 쓰고 멈췄다가, 다시 지우고, 또다시 썼다. 연필 끝이 종이 위에서 머뭇거릴 때마다 아이의 어깨가 조금씩 올라갔다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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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되지 못한 마음을 글로 쌓습니다. 기억과 계절, 감정의 결을 따라 걷는 이야기꾼. 햇살 아래 조용히 피어난 문장을 사랑합니다." 주말은 쉬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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