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끝에서 마주한 오늘
다온은 다시 그 길을 걷는다.
언젠가 멈춰 섰던 곳.
그 자리에 달은 여전히 떠 있고,
그녀는 그 아래를 걷는다.
이제는 두렵지 않다.
그 길에 얽혀 있는 기억도,
다시 꺼내 보는 이름도.
시간은 네 번의 계절을 돌고,
다온은 그 모든 계절을 무사히 지나왔다.
그해 봄.
벚꽃은 어김없이 피었고,
햇살 아래 선우는 작은 도시락을 꺼냈다.
뚜껑을 열자마자 터져버린 웃음.
김밥이 엉망진창으로 말려 있었다.
“이게 뭐야?”
다온이 웃으며 말하자, 선우는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맛은… 괜찮을지도 몰라.”
그 어설픈 말이 다온의 웃음을 더 키웠다.
벚꽃잎보다 더 오래 남은 웃음.
그 순간, 다온은 스스로도 몰랐던 마음의 문을
조금씩 다시 열고 있었다.
여름.
함께 떠난 작은 해변 도시.
뜨거운 햇살과 소란스러운 파도 소리,
그리고 늦은 밤의 고요.
그날 밤, 다온은 파도가 닿는 백사장에서 조용히 말했다.
“내가… 다시 웃을 수 있을 줄 몰랐어.”
선우는 대답 대신 다온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은 예전과는 달랐고,
말로 하지 않아도 충분히 전해지는 온기를 품고 있었다.
흔들리지 않는 감정.
확신이라는 이름의 따뜻함이었다.
가을엔, 선우가 다온이 좋아하던 시집 한 권을 건넸다.
“이 문장, 너랑 닮았어.”
손끝이 머문 페이지엔 이런 구절이 적혀 있었다.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사랑으로 덮일 뿐이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다온은 문득, 자신이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현의 빈자리에 머물며 울고 있던 시간이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다른 색으로 덧칠되고 있었다.
겨울.
눈이 참 많이 내리던 날,
선우는 회색 머플러 하나를 들고 다온을 찾아왔다.
자신이 직접 짠 머플러였다.
“이거… 어설프지만, 따뜻하긴 해.”
그는 멋쩍게 웃으며 다온의 목에 그것을 감아주었다.
“올해는… 나랑 같이 걸어줄래?”
맹세도, 약속도 아닌
그저 한 계절의 조용한 청유.
그러나 다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 계절을 지나며,
다온은 이현의 이름을 가끔 떠올렸다.
어떤 날은 꿈속에서 나타나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고,
어떤 날은 달빛처럼 조용히 스며들어
가슴 깊은 곳을 두드렸다.
그러나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그리움은 여전했지만,
상처는 이제 말랑하게 아물었다.
달은 변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언제나처럼.
이현이 웃고, 이현이 사라졌던 모든 날들이
그 달 아래에 있었다.
하지만 다온은 이제,
달을 보며 울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속삭인다.
“안녕, 나의 오래된 그리움.
그리고 안녕, 지금의 나.”
그 말에 이어지는 침묵은
예전처럼 공허하지 않았다.
포기나 체념이 아닌,
진심으로 괜찮아졌다는 확신.
이제는, 정말 괜찮다.
그날 밤, 다온은 오랜만에 글을 썼다.
창가 너머로 눈이 흩날리고,
그녀는 새로 산 크림색 노트의 첫 장을 천천히 넘겼다.
‘그리움이 다해지면 무엇이 남을까?’
첫 문장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무언가를 채우려 애쓰지 않아도,
비워내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밤.
지금의 다온은 그 모든 것을 지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었다.
그러다 핸드폰 화면이 은은하게 빛났다.
기억 속엔 오래전 차단해 두었던 번호.
그 번호가 또다시, 두 통의 부재중 통화를 남기고 있었다.
그 아래,
[차단된 메시지 1건]
다온은 한참을 화면을 바라보다,
그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읽지 않아도,
그 메시지가 누구에게서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이현.
그는 여전히, 그녀에게 닿고 싶어 했다.
같은 시각,
공항 도착장.
낯선 발걸음으로 입국장을 빠져나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짙은 코트 깃을 올리고,
여권과 휴대폰을 손에 쥔 채
낯선 공기에 깊은숨을 들이켰다.
그는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열었다.
그리고,
한 번호를 눌러 문자를 보냈다.
“도착했어.
늦었지만, 네가 괜찮다면
다시 얘기하고 싶어.”
그는 곧바로 화면을 끄지 않았다.
답이 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잠시 그 화면을 바라봤다.
그 뒤로
수많은 여행객이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는 누군가를 기다렸고,
누군가는 누군가를 떠나보냈다.
그는 누구를 기다리는 사람도,
누군가에게 기다림을 줄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너무 늦게 돌아온 사람이었다.
다온은 그 메시지를 열지 않았다.
읽지 않아도,
그 문장의 결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메시지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잠시 머물다,
그냥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밖엔 눈이 그치고 있었다.
달은 흐린 구름 뒤에서 어렴풋이 빛났고,
그 빛 아래 다온은 조용히 속삭였다.
“달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네.
하지만 나는… 이제 조금 멀리 와 있어.”
그 말 뒤엔
어느새 따뜻해진 커피 향이 따라왔고,
다온은 다시 펜을 들었다.
창밖 풍경은 여전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지 않았다.
그리고 페이지 위엔
이렇게 적혔다.
“안녕, 나의 오래된 사랑.
그리고 안녕, 나의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