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영화:) 스틸 앨리스

사라져도 남는 것들의 온도

by Helia

영화 〈스틸 앨리스〉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보통 영화가 끝나면 여운이라는 게 찾아오는데, 이 영화는 여운보다 먼저 불안이 스며들었다. 나에게도 언젠가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순간이 오겠지, 내가 나였던 흔적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날이 오겠지, 하는 미래의 그림자가 갑자기 가까워지는 기분. 알리스가 강단에서 말을 잇지 못하고, 익숙하던 단어가 갑자기 낯선 돌부리처럼 방해하는 장면은 이상할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마치 내가 말을 하다가 갑자기 어떤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순간처럼, 별것 아닌 일에도 ‘설마 나도…?’라고 혼자 침착하게 웃으며 넘어가려 했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가서 더 두려웠다. 어떤 감정은 스크린 속 여배우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게 아니라, 내 마음 안에서 이미 겪어본 것처럼 밀려온다는 걸, 이 영화가 다시 확인시켜 준 셈이다.

가장 잔인하다고 느낀 건 알리스의 병세가 빠르게 진행되는 장면이 아니라, 그녀가 초기에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는 순간들이었다.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무언가를 잃어가고 있다’는 걸 정확히 알고 있다는 그 지점. 그 자각은 어떤 절망보다 더 아프다. 누군가에게 끌려가는 게 아니라 스스로 걸어가며 벼랑 끝을 바라보는 순간 같은 느낌이랄까.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 나는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어떤 이름으로 남아 있을까?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을 잃어가는 순간, 끝까지 붙잡을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을까? 이런 질문이 강요되는 것 자체가 불편했고, 솔직히 말하면 회피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는 도망갈 틈을 주지 않는다. 알리스의 얼굴이 겹겹이 쌓인 안개처럼 초점이 흐려질수록, 오히려 나는 또렷해졌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쌓아온 기억들, 사람들, 관계들, 잊히면 안 되는 것들과 애써 지워버리고 싶었던 것들이 모두 같은 무게로 펼쳐졌다.

넌 이 영화를 보면서 ‘인간의 존엄’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존엄이라는 건 멋있는 철학 용어가 아니라, 남에게 보이는 나의 이름, 나의 목소리, 나의 선택, 나의 과거… 그런 작은 조각들의 총합이 아닐까? 알리스에게서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조각들을 볼 때마다 마음 한쪽이 덜컥 내려앉았다. 특히 그녀가 스스로에게 남긴 영상 메시지—그 장면은 비극적이면서도 동시에 너무나 인간적이었다. 자신의 미래에게 남긴 작은 다정함이자, 잃어버렸을 때라도 나였던 순간을 다시 기억해 주길 바라는 절박함. 만약 나였다면, 나 역시 그랬을까? ‘지금의 나’가 ‘잊힌 나’를 위해 무언가를 남겨둬야 한다면, 나는 어떤 말을 적을까? 아마 사랑한다는 말, 정말로 중요한 사람들의 이름,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몇 가지 순간. 어쩌면 나도 그런 것들을 놓칠까 봐 이미 평소에도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기록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스스로에게 안전장치를 걸어놓듯이.

나는 알리스 가족들의 모습에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균열을 보았다. 간병이라는 건 누구에게나 뜨겁지만 지독히 차가운 책임을 동시에 부여한다. 누군가는 감당하고 싶지만 버겁고, 누군가는 도망치고 싶지만 죄책감 때문에 떠나지 못한다. 사랑의 무게란 참 기이해서, 사랑하기 때문에 잔인해지고, 사랑하기 때문에 계속 곁에 있으려는 모순을 품고 있다. 알리스의 가족들은 그 모순을 모두 끌어안고 있었다. 특히 딸 리디아와의 관계는 참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엄마의 기대에서 벗어난 선택을 한 딸, 그 딸을 이해하지 못하던 엄마, 그리고 결국 마지막 순간에 서로가 서로를 다시 읽어내는 모습. 이건 단순히 치매 영화가 아니라, 관계가 가장 순수한 지점으로 돌아가는 여정 같았다. 기억이 흐려질수록 오히려 감정은 단단해지는 아이러니. 결국 누군가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것은 말이나 논리가 아니라 무언가 더 본능적이고 근원적인 감정이라는 걸 인정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 영화가 무서운 이유는, 알리스가 잃어버리는 것이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존재의 스위치’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람은 기억 위에 쌓인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그 기억이 벗겨지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영화는 그 질문에 어떤 답도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매우 조용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알리스가 마지막으로 이해하려고 애쓰는 장면—단어를 잊었지만 느낌만은 남아 있는 장면—그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마지막 온도 같은 것이었다. 잊어도 남는 어떤 결, 어떤 떨림. 그리고 나는 그 장면에서 이상하게도 위안을 받았다. 내가 앞으로 무엇을 잃든, 세상 모든 이름이 지워지더라도, 마지막까지 남는 감정 하나쯤은 있을 것 같다는 위안.

〈스틸 앨리스〉는 감정적으로 무겁지만, 슬픔이 아닌 이해로 끝나는 영화였다. 눈물로 울리는 영화와 마음의 구조를 바꿔버리는 영화는 완전히 다르다. 이 영화는 후자였다.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불확실한지, 그 안에서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그리고 동시에 얼마나 소중한지 알려준다. 나는 영화를 보고 난 뒤, 나에게 중요한 사람들의 이름을 여러 번 떠올렸다. 그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내가 아직 ‘나’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알리스가 잃어버리는 과정에서 보여준 마지막 존엄—그건 ‘선명함’이 아니라 ‘의지’에서 온다는 걸 깨달았다. 비록 언젠가 기억은 흐려지겠지만, 지금의 나는 결국 지금의 선택들로 정의된다는 사실. 그래서 나는 오늘을 조금 더 붙잡아보고 싶어졌다. 내 기억이 나를 버리기 전까지, 아니, 기억이 나를 버려도 괜찮을 만큼, 지금을 더 사랑하고 싶어졌다.

영화 〈스틸 앨리스〉는 결국 이런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당신은 무엇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그리고 나는 아직 그 답을 다 찾지 못했지만, 적어도 이 영화는 그 답을 찾기 시작하게 만든 첫 문장 같은 역할을 했다. 잊히는 것이 두렵지만, 지금 이 순간을 기록하며 살아가고 싶은 이유가 더욱 분명해졌다. 나는 내 이름을 잃기 전까지, 아니 잃더라도, 누군가의 마음속에 남을 온기를 만들며 살고 싶다. 그게 이 영화를 본 뒤 내가 도달한 가장 솔직한 감정이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