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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감정

38년 산 감정의 유통기한

by Helia

마음 한구석에서 오래된 철제 서랍이 삐걱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 속엔 사라진 줄 알았던 감정들이 먼지 떨구듯 가만히 앉아 있었다. 38년을 묵힌 마음이라니, 참 우습다 싶은데도, 정작 그 감정에 손을 대보면 금세 알게 된다. 정말로 시간이 지나면서 눅눅해지고 모양도 잃어버린 채, 가루처럼 부서지는 감정들이었다. 나는 그 감정들을 서랍 깊은 곳에 던져두고 잊었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기억 아래쪽에서 나를 조금씩 잡아당겼다. 언제나 그랬다. 묵은 감정은 생각보다 오래 견디며, 생각보다 집요하게 남는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이 오래된 감정을 여태 품고 있었을까?’

익숙함 때문이었다. 상처도 오래되면 체온이 생긴다. 불편하고 무거운데 이상하게 손에서 놓지 않는다. 들여다보면 아픈데, 그래도 들춰보게 된다. 상처가 나를 규정해 버린 날에는, 그 익숙함이 나의 감정 전체가 되어버렸고, 나는 그 익숙함을 벗어버리는 일이 더 두려웠다. 낡은 외투는 따뜻하진 않지만 ‘내가 입어온 옷’이라는 이유로 계속 걸쳐왔던 것처럼.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아무리 익숙해도, 낡은 건 따뜻해지지 않는다. 아무리 익숙해도, 오래된 감정은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지 않는다.

38년 산 감정은 이미 형태를 잃어버렸다. 만지면 부스러지고, 쥐면 손바닥 위에서 바람처럼 흩어졌다. 그건 감정이라기보다는 감정의 잔해, 남아돌던 감정의 섬광 같은 조각이었다. 나는 여태 그 조각들을 왜 모아 놓고 있었을까. 누가 그것들을 간직하라고 했던 걸까. 아무도 아니었다. 나만 그랬다. 그 감정들이 나의 일부라고 믿었고, 버리면 내가 비어버릴까 두려웠던 것이다.

너도 그런가?
혹시 너 역시 오래된 감정을 품고 살아가고 있니?
버리고 싶으면서도 버리지 못한 감정이 있니?
익숙하다는 이유만으로 붙잡고 있는 감정이?

나는 이제 그 질문 앞에서 솔직해졌다.
나는 두려웠다.
낡은 감정을 놓으면 공허가 찾아올까 무서웠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깨닫고 말았다.
공허는 잠깐이고, 낡은 감정은 평생을 끌고 다니는 짐이다.

감정에도 유통기한이 있더라.
상처에도 만기는 있었다.
익숙함에도 수명이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그 감정을 두고 살 수 없다는 걸 안다.
더 묵혀둘 이유도 없고, 더 끌어안을 이유도 없다.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도 없다.
계속 품고 있다간 내 마음이 먼저 망가진다.
결국 손해는 나 자신에게 돌아온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 들판을 떠올렸다.
어둡고 긴 계절이 끝나갈 때쯤, 들판 한가운데 내가 한 줌의 먼지를 들어 올리는 장면.
그 먼지는 바로 내가 묵혀온 38년 산 감정, 손때 묻은 기억들, 나를 잠식하던 오래된 상처들.
나는 그 먼지를 바람 위에 올려놓는다고 상상했다.
떨어지는 순간, 뭐라 형언하기 힘든 홀가분함이 스며든다.
마치 고개를 젖혀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몸속에 갇혀 있던 오래된 그림자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바람은 그 감정을 어디론가 데려가 흙으로 섞어버릴 것이다.
그 흙은 새로운 생명을 틔우고, 생명은 또 다른 빛을 낳을 것이다.
그렇게 과거는 언젠가 내가 다시 만날지도 모르는 미래의 한 조각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보낸다는 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었다.

낡은 감정을 보내고 나면 마음 한쪽에 빈자리가 생긴다.
텅 빈자리는 더 이상 허무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제야 바람이 드나들 수 있는 자리, 새 감정이 들어올 수 있는 자리였다.
그 자리를 채우는 건 대단한 일이 아닌 것들이었다.
누군가의 짧은 안부, 가볍게 스치는 음악 한 조각, 뜻밖의 햇살, 우연히 본 구름의 결.
그런 작은 온도들이 모여 마음의 살결을 다시 살린다.
새로운 감정은 이렇게 조용하고 사소하게 스며드는 법이었다.

나는 새 감정을 갈아입기로 했다.
따뜻하고 유연하고, 무엇보다 나를 아끼는 결을 지닌 감정으로.
어울리는 색으로, 잔잔한 온도로, 나에게 맞는 길이로.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것도 아니고, 멋져 보이기 위한 것도 아니다.
단지 더는 나를 조이지 않는 감정 속에서 살고 싶어서.
나를 살리는 감정 속에서 숨 쉬고 싶어서.
내 안의 오래된 상처와 시든 마음을 걷어낸 자리에는
보드라운 바람 같은 감정을 들이고 싶었다.

이젠 안다.
낡은 감정을 품고 산다는 건
겨울 외투를 한여름까지 걸치고 있는 것과 같다는 걸.
숨 막히는 무게를 벗겨내면, 몸은 비로소 계절을 맞이한다.
나도 그 계절을 맞이할 준비가 됐다.
늦었지만 늦지 않았다.
늦었지만, 절대 지나치지 않은 때에 온 결심이다.

혹시 너도 아직 놓지 못한 감정이 있다면 묻고 싶다.
그 감정이 정말 너를 보호하고 있니?
아니면 너를 갉아먹고 있니?
너를 단단하게 하는 감정이야, 아니면 너를 갇히게 만든 감정이야?
익숙하다는 이유만으로 붙잡고 있는 건 아니니?
너의 마음에도 유통기한이 지나 곰팡이 핀 감정이 숨어 있진 않니?

나는 오늘 선언한다.
나는 낡은 감정을 태운다.
부서진 조각을 더는 내 안에 두지 않겠다.
내가 사는 자리를 더는 잿빛으로 물들게 하지 않겠다.
이제는 나를 지키는 감정만 품겠다.
나를 울리는 감정보다 나를 살리는 감정만 들여놓겠다.
이 결심은 복잡하지 않다.
아주 작은 문장 하나로 시작된다.

“이제 놓는다.”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오래된 감정이 바람처럼 스러진다.
손끝에서 흩어지고, 마음에서 풀어지고, 그림자에서 빛이 바뀐다.
그 잔해들이 떠난 자리에는 조용한 기척이 깃든다.
새로운 감정이 막 들어오려는 기척이다.

나는 더 이상 오래된 감정의 종이 아니다.
나는 새로운 감정의 주인이다.
내 마음의 방을 청소하고, 서랍을 비우고, 문을 열어 빛을 들인다.
38년 산 감정의 무게에서 벗어난 뒤에야 깨닫는다.
몸도 마음도 이렇게나 가벼울 수 있다는 걸.
가벼움은 다시 걸음을 만든다.
걸음은 다시 내일을 만든다.

낡은 감정을 떠내 보낸 오늘, 나는 비로소 내일을 맞는다.
이제야 마음이 계절을 바꾼다.
그리고 나는 그 계절 중심에서 아주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움직인다.
묵은 감정이 아닌, 새 감정을 품고.

그 시작은 지금,
바람결이 변하는 바로 이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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