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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빛을 잃지 않는 마음의 등불

by Helia

가치라는 말은 손끝에서 사라지는 온기를 잡아보려는 것과 닮아 있다. 잡는 순간 빠져나가고, 놓아버리면 뒤늦게 그 따뜻함이 밀려온다. 살아오며 가장 많이 집착한 단어였지만, 정작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단어이기도 하다. 남들은 쉽게 말한다. “네 가치는 너 자신이 지켜야 한다”라고. 하지만 그 문장은 살아온 날들의 무늬를 뒤집어 보면 비로소 제 뜻을 드러낸다. 지켜낼 가치를 모르면, 지키라는 말 또한 공허한 메아리처럼 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결국 ‘무엇을 잃지 않을 것인가’를 찾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 속에서 조금씩 선명해지는 결 하나가, 결국 내 삶을 떠받치는 기둥이 된다.

나는 오랫동안 나의 가치를 남의 손에 맡겨버리며 살았다. 누가 좋아한다고 하면 기뻤고, 무심한 말 한마디에 쉽게 금이 갔다. 마치 사람들의 말과 태도가 나의 가격표를 붙이기라도 하는 듯, 그들의 표정에 따라 나의 존재가 흔들렸다. 그때의 나는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 타인의 기대라는 조명 아래 서서 휘청거리는 그림자에 가까웠다. 내 그림자를 나라고 착각하며 살던 시절, 나는 너무 쉽게 무너졌고, 너무 자주 위축되었다. 하지만 그 시간 속에서도 깨닫지 못한 것이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먼저 나를 하찮게 여길 때 세상도 덩달아 나를 가볍게 취급한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내리누르는 말과 행동을 가벼운 장난처럼 받아들였지만, 그 작은 균열이 결국 나라는 존재 전체를 무르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지친 마음을 감싸듯 이런 문장이 스스로에게서 흘러나왔다.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말은 네 입에서 먼저 나오게 하지 마. 네가 네 편이 되는 순간, 세상 누구도 널 함부로 건드리지 못해.”
그 말은 생각보다 오래되었고, 생각보다 간절한 진실이었다. 내가 나를 축소하는 순간, 남들은 나를 접는 방향으로 더 힘을 실었다. 내가 나를 밀어내는 순간, 남들은 나를 한 걸음 더 멀리 밀쳐냈다. 아무도 나를 구해주지 않는다고 서운해하면서 정작 나 자신은 매일 나를 조금씩 떠나보내고 있었다. 그 모순을 깨달은 날, 나는 내가 잃고 산 것이 ‘자신감’이 아니라 ‘자기편 애착’이라는 걸 알았다.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고 느껴지던 날조차, 사실 나는 ‘나’라는 한 사람을 잃어버리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나는 다시 배웠다. 가치는 돌처럼 단단하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소금처럼 스스로의 눈에 녹여야 비로소 형태를 갖춘다는 것을. 남의 눈에는 눈송이처럼 가벼워 보이더라도, 내 안에서는 눈덩이처럼 묵직하게 자라날 수 있는 것. 그 변화는 누구에게도 보여줄 필요가 없다. 조용히, 대신 확실하게 나에게서부터 시작하면 된다. 누군가의 기준에서 빗겨 난 자리라도 내 마음이 편히 앉을 수 있는 곳이라면 그것이 곧 나의 자리다. 그 자리에서 생겨나는 감정의 결이 바로 가치를 만든다. 누군가의 화려한 인정보다, 내 안에서 들리는 작은 속삭임이 훨씬 오래 머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 사이의 가치 또한 비슷한 결을 가진다.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라고 해서 꼭 소중한 것은 아니고, 짧게 스친 인연이라고 해서 얕은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은 찬 바람 같은 말 한 줄로도 마음속 문을 닫게 만들고, 어떤 사람은 작은 따뜻함 하나로도 마음의 불을 다시 켜준다. 결국 사람의 가치는 관계의 길이가 아니라 감정의 깊이가 결정한다. 오래 있어도 가볍게 사라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번 스쳐도 마음에 오래 남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들을 구분하기 위해 필요한 건 오랜 시간이 아니라, 내 마음이 흔들리는 방향이다. 그 흔들림의 결이 가리키는 쪽에 진짜 가치가 자리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스스로의 가치를 잃지 않는 것이다. 남의 칭찬이 없어도 괜찮고,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누군가가 나를 오해해도 내가 나를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유명해지지 않아도 존엄은 사라지지 않고, 돋보이지 않아도 존재의 무게는 가벼워지지 않는다. 존재만으로 이미 충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 그 기억을 붙잡는 순간, 세상의 시선은 더 이상 내 가치를 흔들 수 없다. 남의 말에 흔들릴 필요가 없다는 말은 결코 오만이 아니라 생존이다. 내가 나를 붙들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나를 진심으로 붙잡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나에게 말한다.
“너의 가치는 남이 매기는 가격표가 아니야. 네가 너에게 붙이는 이름이야. 흔들려도 잃지 마. 너는 이미 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충분한 사람이다.”
이 문장은 내 안의 작은 등불처럼 흔들리면서도 꺼지지 않는다. 어둠이 짙어올 때일수록 더 선명하게 빛을 띤다. 가치는 남들이 켜주는 조명이 아니라, 스스로 켜두는 등불이어야 한다. 그래야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는다. 내가 점등한 빛이기에 내가 지키는 법도 알고, 다시 밝히는 법도 안다. 이 등불을 잃지 않는 것이 바로 나의 삶이 가진 진짜 의미다.

살아가다 보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온다. 상처를 주는 말들이 스며들고, 나를 지지해 주던 사람들이 멀어지고, 외로운 날들이 길어질 때가 있다. 하지만 그 모든 흔들림 속에서도 지켜야 하는 단 하나는 바로 나의 가치다. 그걸 붙들어야만 무너지는 날에도 다시 일어설 힘이 생긴다. 나를 향한 견고한 애착이 있어야 마음의 균열을 메울 수 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곁에 있어도 내가 나를 지지하지 않으면 결국 텅 빈 방과 같고, 아무리 적은 사람이 남아 있어도 내가 나를 믿으면 그 방은 온기를 잃지 않는다.

나는 이제 안다. 나의 가치를 지키는 일은 세상의 기준을 이기는 일이 아니라, 나 자신과 손을 맞잡는 일이라는 것을. 누구도 나를 대신해 그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 나를 무너뜨리는 말도 나로부터 시작되고, 나를 다시 세우는 말도 결국 나로부터 온다. 그래서 나는 가능한 한 나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한다. 나를 낮추는 말은 삼키고, 나를 지켜주는 말을 천천히 꺼내놓는다. 그렇게 하루하루 나를 다시 세우면서, 나는 내 삶의 무늬를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다. 그 무늬는 남들이 알아보지 않아도 괜찮다. 나만 알아보면 되기 때문이다.

가치는 거창한 성취에서 오지 않는다. 나를 미워하지 않는 하루, 나를 버리지 않는 마음, 나를 외면하지 않는 선택에서 온다. 아무도 모르게 다짐하는 조용한 문장 하나가, 스스로에게 건네는 미약한 위로 하나가, 마음 깊숙이 새겨지는 작은 기쁨 하나가 결국 가치를 쌓아 올린다. 그 결들이 모이면 비로소 나는 내 삶을 사랑할 수 있게 되고, 사랑하게 된 순간부터 삶은 더 이상 나를 밀어내지 않는다. 내가 나에게 머무를 수 있게 해주는 힘, 그게 바로 가치다.

이제 나는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내 가치는 내가 지킨다.
나를 잃지 않기 위해 오늘도 나는 나의 편이 된다.
그리고 이 진실 하나만은 꼭 기억한다.
“네 가치는 이미 충분하다. 존재만으로도 빛나는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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