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앉아 글을 쓰다 보면 첫 줄부터 막힌다. 뭘로 쓸까를 고민하면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게 되는데, 이것은 마치 주객이 전도된 모습이다. 글이야 쓸 일이 생겨야 쓰는 것인데 글을 쓰기 위해 일없이 앉아있는 것이다. 혹은 목적과 행위가 뒤바뀌는 바람에 목적한 것들이 아닌 과정에 사로잡혀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나의 삶도 그랬다. 허구한 날 피상적인 것에 집착하고 디자인을 어떻게 할까 색을 어떻게 입힐까를 고민했는데 그 수준이 높지도 않을 뿐더러 그렇게 나온 결과물도 본질과는 거리가 멀었다. 묵직한 본질이 빠져 있어 디자인된 껍데기만 팔랑거렸다. 내가 본질에 집착을 하게 된 이유다.
본질을 제외하면 그 외의 것들이 전부 다 요식행위다. 형식도 중요한 요소이지만 본질에 앞서지 않는다. 본질을 더 돋보이게 만들어 주는 게 형식일 수는 있지만 본질 없이 형식만 남으면 그건 껍데기일 뿐이다. 그리고 그 껍데기를 갈고 닦느라 노력을 했다. 헛수고를 했다. 본질에 다가가는 것은 적어도 나 같은 인간에게는 훨씬 더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했다. 몸으로 뼈저리게 느껴야 그제야 내 마음속으로 들어와 콱 박혔다. 인이 배겨야 그나마 본질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습관이 행동으로 나오지 않고서는 내 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본질을 입는 삶이란 그래서 군더더기가 없고 깔끔하다. 수수한 모습이 본질을 더 잘 보여주기 때문에 수수해 지는 게 아니다. 본질에 가닿으면 어느새 군더더기가 필요 없어지기 때문에 수수해지는 거다. 미니멀 라이프에서 미니멀이 중요해지고 라이프가 소홀해지면 주객이 전도된다. 애초에 왜 단출한 삶이 필요한지 스스로의 충분한 고민이 필요하다. 담백해진 삶이라 물건이 필요 없어지는 것이라면 본질이 맞다. 하지만 미니멀라이프가 요즘 유행하는 멋진 라이프 스타일이라서 선망하는 건 주객이 전도된 거다.
사람들의 가난과 고통을 도구로 삼아 자신의 선행을 돋보이려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그' 사진의 주인공은 가난과 병으로 고통받는 아이였어야 한다. 이조차도 지금 시대에는 빈곤 포르노로 비난을 받아 마땅한데 심지어 '그' 사진의 주인공은 아이가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다. 텔레비전에 (어떠한 모습으로든) 내가 주인공으로 나왔으면 정말 좋겠는 심정은 이해하지만 자신의 가녀린 외모와 어디서 본 듯한 장면 속의 주인공은 이미 따라쟁이임과 동시에 자신의 진심이 어긋나 있다는 걸 다시금 확인시켜 주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진심 없는 '그' 사진의 비참함은 아마 말해주어도 모를 것이다. 껍데기는 가벼움이 채 한 줌이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