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늦깎이 대학생으로 서른한 살에 재활 치료 분야 중 ‘작업치료’를 전공했다. 작업치료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일상생활에서의 작업영역을 치료하는 전문영역이다. 띠동갑인 나는 어린 동생들과 공부를 함께 하다 보니 당연히 학업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뒤늦은 공부가 무척 흥미로웠다.
특히,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일상생활을 독립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하지만 신체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정신적 영역에 문제가 생기면 생활하는데 많은 지장이 생겨난다. 대표적인 것이 우울증, 치매 등이다. 학부를 전공하며 자연스럽게 심리학에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어쩌면 유전적으로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나의 정신적 건강에 대한 취약성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졸업 후 석사과정에 이어 쉼 없이 학업적 성취에 가득 차 박사과정까지 달려갔다. 내가 그토록 알고 싶고 갈망하던 심리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 무척 건강하다고 자신했었다. 결코, 만만치 않은 분야였지만 3년 반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곧바로 내가 졸업한 대학 모교의 교수로 임용되었다.
20대 초반에 직장생활을 한 경험이 있었지만, 부모님 아래 보호받으며 사회인으로서는 많이 부족한 사회를 경험한 나였다. 대학의 교수로 일을 하며 겪어야 하는 수많은 고충은 지금껏 알지 못했던 세상을 새롭게 배우는 초보자에게는 처음 겪는 힘든 일이었고, 모든 것이 부족함투성이라 서투르기만 하였다.
그때만 해도 나는 대학교수가 학생한테만 좋은 교육자면 된다고 오인했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학과 내에서의 갈등과 조직 안에서의 서툰 나의 역할이 점점 더 나를 병들게 했다.
내가 심리학을 전공했던 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심리적인 나의 취약성 때문이었는데 세상은 결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어찌도 정확히 나의 취약함이 그대로 투영되는지 결국 나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의해 적응 장애라는 진단과 함께 공황과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심리학 박사가 어떻게 정신적으로 아플 수 있어? 라는 생각과 함께 매일 한 계단씩 무너져 갔다.
수업을 진행해야 하는데 어떤 날은 갑자기 심장이 아파 중단을 해야 했다. 심할 땐 전날 응급실을 다녀와 다음날 출근을 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놓이는 날이 늘어만 갔다. 내가 전공한 작업치료에서 말하고 있는 정신적 영역의 문제로 일상생활에 빨간불이 켜진 것이다. 분명히 내 몸이고 나의 신체인데 그리고 내 정신을 스스로 컨트롤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죽고 싶었다. 내가 꿈꿔왔던, 그토록 노력하며 달려온 학자로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학생들 앞에 서면 조그마한 생쥐가 된 듯 스스로 움츠러들고 작아진 나를 느꼈다. 두려웠다. 아니 공포감마저 느꼈다. 그런 시간이 반복되면서 나는 점점 더 공황이 잦아지고, 더욱더 우울해져만 갔다. 급기야는 대학병원의 정신건강의학과에 입원 하는 상황까지 왔다.
입원한다는 건 자의 또는 타인에 의해 더는 일상생활을 지속할 수 없을 만큼 긴급한 상황일 때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 심리학 박사학위가 속수무책으로 나날이 무너져 갔다. 마음이 몹시 아팠다. 그리고 슬펐다. 살고 싶지 않았다. 열심히 살아보려고 노력하며 다져온 나의 삶이 이렇게 무너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온 세상이 캄캄하고 온통 원망으로만 가득 찼다. 웃는 날보다 우는 날이 많아졌고, 살고 싶은 날보다 죽고 싶은 날들이 늘어났다.
어느 날은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는 날로, 또 어느 날은 나에 대한 부족함과 질책의 날로, 수없이 반복되는 부정적 사이클은 나를 깊은 수렁 속에 가두어 그야말로 우울증 환자의 신세가 되었다.
우울한 괴로움을 벗어나고 싶어서 술도 마셔보았다. 동네 산책로를 몇 바퀴씩 걸으며 운동도 해보았다. 친구를 만나보기도 하고, 동료 교수님께 하소연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 순간일 뿐 모든 건 그대로 원위치에 되돌아와 있었다.
‘이거 뭐야, 내가 이러려고 우리 아들 여섯 살에 대학에 입학해 뒤늦은 공부를 하고, 석사학위 받고 심리학 박사 공부를 한 거야?’
나는 나 자신을 학대하기 시작했다. 하염없이 무너지고 있는 나를 막을 수도 없었고 방법도 몰랐다. 주치의 선생님이 처방해주시는 독한 약에 취하고, 어느 날엔 맥주에도 취했다. 약과 술이 상극이라 걸 누구보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나를 제어하지 못했다. 그렇게 나를 괴롭히는 시간은 계속되었다.
결국은 학교 수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내 몸과 마음이 병들었다. 그리고 마치 정해진 수순을 밟듯 병가를 내야만 했다. 병가 후 나는 더욱더 처참해졌다. 건강을 책임져야 하는 의료관계인이 내 몸 하나 추스르지 못하고 학생들 수업에 지장을 주고, 학교에도 염려를 끼쳤다는 자책감에 우울은 날로 깊어졌다.
하루 종일 암막 커튼을 쳐 놓고 침대에서 나오지 못했다. 먹는 것도 싫었다. 환한 햇살을 보는 게 그냥 싫었다. 그렇게 침대에 누워 시체처럼 누워만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유튜브를 보게 되었다. 독일인이 운영하는 채널이었는데 동기부여와 관련된 영상들이 펼쳐졌다. ‘와~! 독일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한국 사람 살리겠다고 서툰 한국어로 저렇게 진심이 어린 영상을 찍다니…!’ 그러면서 나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또 부끄러웠다.
한국 사람이 한국에서 모국어로 편하게 살 수 있는 이 좋은 조건에서 난 도대체 왜 이런 모양새일까? 또 다른 유튜브도 보게 되었다. 핫하게 유행했던 미니멀 라이프를 다루는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게 되었다.
무슨 마음에선지 나는 갑자기 내 살림을 다 버리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도 없고, 판단도 없이 그냥 모조리 버렸다. 오죽하면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이사 갈 거냐고 물어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집에 있던 여덟 개쯤 되는 대형 화분도 다 내다 놓았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나는 나를 비우고 싶었던 것 같다. 내 속에 있는 모든 욕심과 과욕 내지는 소유에 대한 모든 걸 내어버리면 내가 다 치유될 거라고 착각했었던 것 같다. 버리다 버리다 나중엔 살던 집도 부동산에 내놓았다. 내가 8층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8층에서 추락하고 있는 나를 상상했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가족과 아파트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최소한의 의식은 있었던 모양이다.
아파트를 내놓자마자 바로 계약자가 나타났고, 나는 채 5분도 안 걸리는 가까운 곳 2층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살고 싶은 몸부림이었다. 돈이 여유가 없었음에도 평수를 더 늘려 이사를 했다. 처음엔 궁궐처럼 느껴지는 평수 넓은 아파트가 참 좋았다. 그건 단지 물리적 충족감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나의 공황장애까지 치료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공황을 앓게 된 후 가정도 직장도 나에게는 모든 게 부담으로 다가왔다. 어느 것 하나 내가 제대로 소화해낼 수 없을 정도로 바닥을 치고 있었다.
과연 내가 살아야 하나? 난 살 수 있을까? 아니 나 살 자격이 있는 사람이야? 스스로에게 죽음을 알리는 무서운 메시지를 계속해서 읊어댔다. 내가 배워온 지식적인 이론도 그리고 신앙적으로 쌓아왔던 영적 깊이도 아무 소용이 없을 만큼 변해가고, 가난한 영혼의 종을 울리고 있었다. 그때 생각했다. 아… 심리학을 전공하면 뭐하니? 심리학 박사면 무슨 소용이 있어? 지금 학교 교수면 뭐를 할 수 있는데…? 나를 붙잡을 수 있는 아무런 대안도 방패도 없었다. 이 순간에 나는 세상에 홀로 서 있는 길 잃은 병든 자, 그 초라한 모습 그 자체였다.
허물어진 정신세계는 일상의 또 다른 변화를 가져온다. 부정적인 자기신념과 함께 희망 없는 미래를 그린다. 긴장된 뇌의 활동으로 인해 운동능력도 지연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가령 말이 어둔하다거나 처리하는 속도가 더딘 증상들이 생겨난다. 신경심리학 박사 논문을 썼던 나였기에 더욱 그 증상들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론과 지식으로 알고 있는 것과 실행의 차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낮아진 자존감의 회복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상황을 상상해보자면 깊은 우물 안에 갇혀 먼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회복 불가능한 난치병 환자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