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취에 고통받는 사람마냥 극심한 두통과 메슥거림이 시작되었다. 20대에는 왕복 4시간의 출퇴근 길에서 자기소개서 첨삭도 해주고 독일어 공부도 했었는데. 나이를 먹긴 먹었나 보다. 차멀미를 하다니.
매일 3시간씩, 그것도 6개월이나 탔으면 이제는 익숙해질 때가 되었건만. 컨디션이 좋지 못한 날에는 어김없이 차멀미를 했고 그날도 컨디션이 좋지 못한 날이었다.
차멀미를 견뎌내기 위해 잠을 청하기로 했다. 제일 쉽게 머리를 창문에 기대었다. 덜덜덜덜덜 진동에 골이 울렸다. 최대한 버텨보려 했지만 참아낼 재간이 없었다. 창문에서 떼어낸 머리를 앞으로 푹 숙이고 다시 잠을 청했다. 덜컹거리는 버스에서 신명나는 헤드뱅잉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지칠 대로 지친 심신이었기에 금방 잠에 들었다.
반쯤 지났을까, 이번에는 목덜미가 너무 아프다. 덕분에 얕은 잠이 깨버렸다. 뜨이지 않는 눈을 또 잠깐 뜨고 목덜미를 주물렀다. 정신은 없지만 차멀미는 그대로였다. 아니, 더 최악이다. 깨질듯한 머리와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속에, 이제는 다 말라버린 뻑뻑한 눈과 뻣뻣하게 굳어버린 목까지 추가다.
중간에 버스를 내려 잠시 쉬었다가 환승해서 다시 타는 방법도 있겠지만 버스가 시골로 들어온 지 오래였다. 낮에도 '외지고 낯선 곳'이라는 공포감이 있는 시골인데, 이미 밤하늘에 어둠도 짙게 깔려 더 무섭다. 심지어 '외지고 낯선 곳'에서는 똑같은 버스 텀도 더 길게 느껴진다.
'그깟(?) 멀미가 뭐가 대수라고. 멀미 좀 진정시키려고 무작정 버스에서 내린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이니?'
'그 무서운 곳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다음 버스는 어떻게 기다릴 건데?'
'너 그러다가 괴한한테 죽으면 어쩌려고 그래?'
콩만 한 내 간과 파김치가 된 심신은 전정기관과 위장에게 '매사에 그렇듯 이번에도 닥치고 가만히' 있으라고 떠들어댔다.
하긴. 정해진 시간에 반드시 집에 도착해야 한다. 늘 집에 도착하는 7시 30분, 늦어도 45분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으면 엄마한테 전화가 올 것이다. '어디냐'고, '집에 안 들어오고 뭐 하냐'고. 그리고 나도 한 번에 가는 것이 좋다. 환승 너무 귀찮다. 버텨내야 한다. 토하지 않고 집까지 가야 한다.
버텨내야 한다. 다른 승객들의 눈을 의식할 처지가 아니다. 시선을 신경 쓰다가 토하면 진짜 대형사고다. 뭔 짓을 해도 토하는 것보다는 낫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의자 등받이에 늘어져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차멀미를 하며 혼미한 정신 중에도 머리는 팽팽 돌아간다. 원래도 염세적이던 머리가 피곤하기까지 하니 더더욱 부정적인 생각들만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현재 내 상황.
나이는 33살이나 처먹고 중소기업 계약직 신세.
계약기간 11개월 중 절반 정도 지난 상태 (5개월 뒤 또 취업 시장에 던져질 예정이라니).
나보다 5살이나 어린데 유능하기까지 한 팀장님을 모시고 있음.
마침 낮에 팀장님께 한 소리 들음.
타닥, 타닥, 타다다다닥….
작은 사무실을 채우는 단 하나의 키보드 소리. 사무실 내에서 단 하나의 키보드 소리가 난다면, 여기저기 SNS를 돌아다니며 한창 참가자를 모집하고 있어야 할 내 키보드에서 나야 하는 소리이다.
하지만 내 키보드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다. 나는 방금도 홍보차 들어간 한 오픈 채팅방에서 강퇴당하고 또 멘탈이 터져 스스로를 달래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다구 제발….'
모니터 뒤에 숨어 그렁그렁 맺히는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참고 있는데 일순 키보드 소리가 멈췄고 팀장님이 입을 열었다.
“우정 씨 지금 뭐 해요?”
간담이 서늘해졌다. 커다란 덩치가 웅크린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동공이 확장되고 심장이 쿵쿵쿵쿵쿵 뛰기 시작했다. 멍 때리고 있던 머리가 다른 의미로 새하얘졌다. 마치 차에 치이는 순간 몸이 굳어버린 고라니 새끼 마냥.
침착해야 한다. 나는 웅크린 자세 그대로 맺힌 눈물을 소매에 살짝 찍어낸 후 목만 살짝 뽑아 올렸다. 낮은 모니터 위로 눈만 내놓고 팀장님과 눈을 맞췄다.
“… 프로그램 홍보 중입니다.”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간신히 대답하고 재빨리 눈을 내리깔았다. 홍보 중이긴 하지. 개복치 전우정이 또 멘탈이 터져서 심호흡하고 있어서 그렇지. 팀장님이 말을 이었다.
“우정 씨. 벌써 당신 계약기간 중 절반이나 지났네요. 세월 빠르다. 그쵸?”
떨리는 목소리를 최대한 숨겨야 한다. 억지로 입꼬리를 당기고 모니터 뒤에 숨어서 대답했다.
“… 그… 러네요….”
“그런데 우정 씨 과업 중에 가장 메인인 기업 컨설팅 프로그램에서 참가 모집을 채 10%도 못 채웠네요?”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무실 안에 정적이 흘렀다. 팀장님이 한숨을 쉬고 말했다.
“어떻게 할 거예요?”
사무실 안에 또다시 무거운 정적이 깔렸다. 빠르지만 구체적인 답변을 해야 한다. 사회란 그런 곳이니까. 기다려주지 않는다. 빠르고 구체적이고 명확한 것을 원한다. 사회란 그런 곳이니까. 그런데 도저히 당장 생각이 안 난다.
‘빨리… 빨리 대답해야 하는데…!!’
새하얘진 머리를 열심히 쥐어짜 본다. 이곳은 공공시설을 운영하는 곳이다. 즉, 홍보가 너무 자극적이거나 저급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에 할당된 예산은 컨설팅 인력에게 줄 ‘전문가비’ 뿐이다. 홍보에 투입할 수 있는 예산은 10원도 없다는 뜻이다. 공공시설이라는 이점을 통해 무료로 할 수 있는 홍보는 다한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업무, ‘오픈 채팅방들 돌아다니면서 직접적으로 홍보하기’. 정말 갑갑하고 간절해서 하고는 싶었지만 공공기관이라는 특성과 맞지 않다고 생각해서 입 밖에 꺼내지는 못했던 방법이다. 그런데 팀장이 말했다. 오픈채팅방들이라도 돌아다니면서 홍보하라고. 그래서 할 수 있었고 하고 있었다.
물론 이것도 당장의 성과는 미미했다. 변명하자면 사유는 크게 3가지.
첫 번째, 이곳은 원래 창업 지원 프로그램을 하던 기관이 아니다. 창업 지원을 처음 해보는 기관이다 보니 기관의 창업 지원 관련 인지도가 없다.
두 번째, 우리가 주력으로 원하는 대상자는 콘텐츠 관련 기업이다. 하지만 우리 지역에 관련 기업 자체가 거의 없다. 차선인 콘텐츠 예비창업자의 경우에도 평일 낮에는 대부분 근무 중이다 보니 평일 낮에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
세 번째, 회당 컨설팅 시간이 무려 4시간이나 된다. 하루 중 절반이나 시간을 할당해야 하다 보니 부담스럽기도 한데 왔다 갔다 시간까지 생각하면 하루를 거의 통으로 빼야 한다.
사실 생각해둔 다른 홍보방안이 하나 더 있긴 했다. 하기 싫어 재껴 놔서 그렇지. 한참의 정적이 흐른 후, 버리려던 카드를 어쩔 수 없이 꺼내어 보였다.
“… 카페랑 제 개인 SNS에도 올리는 등 더 노력하겠습니다.”
"하아."
팀장님이 한숨을 쉬고 고개를 두어 번 저은 후 입을 열었다.
“우정 씨. 우정 씨 나이에 그 연봉 낮은 거 알죠? 일도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은데. 우정 씨가 미워서 그러는 건 아니고 진지하게 다른 일 알아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결국 들어버렸다.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다는 말.
업무를 잘하지 못한다는 말을 돌려 하는 그 말.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다양한 아르바이트와 사회 경험에서 너무 자주 들은 그 말. 그래도 이번 업무는 반은 적성에 맞다고 생각했기에 나머지 반은 노력으로 메꾸면 될 거라 생각했다. 필사적으로 노력했건만 이번에도 듣고 말았다.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다는 그 말을.
나이 대비 연봉이 낮은 점은 괜찮다. 대학을 제때 졸업하고 커리어를 잘 쌓았다면 경력이 10년은 됐을 텐데, 나는 여전히 신입이자 11개월 계약직이니까. 그래서 나이에 비해 연봉이 낮은 점은 매우 당연한 일이니까.
하지만 적성에 맞지 않다는 말은 충격적이었다. 나는 이 일이 적성에 맞다고 생각했고 열심히 했다. 그리고 일에 대한 나의 지론은 ‘급여를 받는 만큼의 값어치는 해야 한다.’ 는 것인데, 최저임금에 가까운 급여라 제값은 하는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