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윤선 Sep 02. 2024

비와 커피 사이

미디어 생활

비 오는 날 이정표 없는 시간을 걷다 보면 마치 세월도 뒷걸음질 치는 것 같다. 여행은 알 수 없는 날씨와도 같다. 갑자기 폭우라도 만나면 걸음을 멈춰 세우고 기도하고 그냥 비 따라 걸음을 재촉하기도 한다.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난 커피가 생각난다. 그렇게 비와 커피가 있는 강릉 카페거리로 갔다. 이 낯선 곳에서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기대된다. 비 오는 안목해변은 세상과 시간이 다른 것 같다. 그곳은 커피로 빗장이 열리면서 자신들이 부지런히 다져온 삶의 길이 커피의 신성(新星)의 길로 거듭났다. 급격한 온난화로 국내에서도 커피가 재배되니 자연은 마치 출구를 알 수 없는 미로 같다.

“가수 싸이만 흠뼉쇼 하냐, 휠체어 탄 나도 흠뻑쇼 한다!”

빗줄기가 굵어지고 바람이 거칠어졌다. 우산을 썼는데도 억수탕을 방불케 하고 비바람은 힘없는 손아귀에서 우산을 자꾸 떼어 놓으려 한다. 이미 옷은 비에 홀딱 젖어 휠체어 방석까지 파고들었다. ‘그래! 어차피 젖을 거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비를 흠뻑 맞아 보랴. 젖은 김에 우산 든 손이라도 자유롭게 풀어줘 힘들이지 말아야지. 가수 싸이만 흠뻑쇼 하나, 휠체어 탄 나도 오늘은 흠뻑쇼다.’ 소중한 휠체어 컨트롤러는 비에 젖지 않게 방수 덮개를 씌우고 비 오는 바닷가를 자유롭게 산책한다. 


그런데 내 옆을 지나가는 여행객의 수군 수군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장애인이 비 오는데 집에 있지, 뭐하러 나왔대.” 하며 말대꾸도 하기 전에 쌩하고 지나가 버린다. 장애인도 날씨와 상관없이 정해진 일정이 있다. 인식의 변화는 혁명보다 어렵다는 게 실감났다. 그렇다고 이렇게 신나는 우중 투어를 포기할 순 없어 바다를 향해 힘껏 소리 질렀다. “그런다고 내가 기죽을 줄 알았지? 천만에 당신의 편협한 인식이 가여울 뿐이야~.” 내지른 소리는 바다 끝으로 퍼져나간다.


안목해변은 열린 관광지로 조성되면서 접근성이 한결 나아졌다. 해변을 따라 보행로와 차도가 구분돼 안전하게 걷기 편리하다. 자판기 커피로 유명했던 안목해변은 19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한국의 커피 문화를 이끈 바리스타 1세대들이 강릉에 정착하면서 커피의 메카로 변신했다. 그때부터 카페가 하나둘씩 생겨나면서 해변 주변은 온통 카페 천지가 됐다.

하지만 카페들이 들어서면서 자판기가 하나둘 사라져 정작 커피 자판기는 몇 대 남지 않았다. 그래도 동전 몇 개로 행복해지는 자판기 커피는 참을 수 없다. 옷이 비에 젖어 한기를 느낄 때쯤 자판기에서 온기를 가득 품은 믹스커피가 툭 떨어진다. 한 모금은 바다를 위해, 한 모금은 가늘어지는 빗줄기를 위해, 또 한 모금은 잦아드는 바람을 위해 건배하며 마셨다. 달빛 쏟아지는 경포대에 올라 하늘, 바다, 호수, 그리고 술잔과 임의 눈동자 등 다섯 개의 달을 위해 술잔을 기울이던 옛 선비의 풍류를 상상하면서 말이다.


가벼운 종이컵에 담긴 커피 맛은 기가 막히다. 이곳이 왜 커피의 성지가 됐는지 알 것 같았다. 달달하고 고소하며 진한 커피는 초콜릿처럼 입안을 감싸며 목젖을 타고 몸속 깊이 파고든다. 한기를 달래기에 충분했다. 꿀 조합의 자판기 커피로 누리는 호사로 세상 부러울 것 없다.

경이로운 바다, 소중한 시간, 장애 불행하지 않다


걱정은 접어두고 카페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자리한 카페는 3층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있어 원하는 층에 자리 잡을 수 있다. 똑같은 커피라도 내가 원하는 자리에 앉으면 분위기도 커피 맛도 다르다. 달콤한 빵 냄새와 향긋한 커피향기가 참을성을 잃게 한다. 달달한 조각 케이크과 헤이즐넛향 가득한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와 케이크의 조화는 아름다웠다. 오감을 만족시키는 이 시간이 느린 화면처럼 더디 가길 바라 본다. 에어컨 냉기가 비에 젖은 옷에 스며들어 서늘하지만, 뜨거운 커피가 몸과 마음을 녹인다. 거친 날씨를 헤치고 이곳까지 온 내가 또 다른 수행자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토록 경이로운 바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해진다


변화무쌍한 자연은 휠체어 탄 일상을 불편하게 하지만 불행하진 않다. 아니 불편도 익숙하면 불편한지 모른다. 나도, 이곳 사람도 자연을 활용하고 때론 순응하며 살아간다. 오랜 세월 척박한 환경을 일구며 끈기 있는 생명력은 앞으로도 지속될 거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물은 흐르고 생명은 움튼다.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진 바다 위로 위태로운 아름다움이 유혹한다. 햇살 한 줌이 구름 사이를 뚫고 나온다. 그 빛으로 생명을 틔우는 작은 꽃들에게서 위대함을 목도한다. 그리고 보면 비워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이곳으로 오는 과정에서 조금 알게 된 듯하다. 새로운 도전을 위해 떠나온 이번 여행에서 충만한 감성과 대자연 앞에서 자신을 비워내고 또 비워낸다. 멀고 험난한 여정은 내 안에 수없이 많은 나와 또 다르게 조우하게 만들 테니까.


<무장애 여행정보>


◆ 가는 길

강릉역에서 장애인 콜택시 즉시콜 이용

전화 1577-2014


◆ 접근 가능한 카페 및 식당

카페거리 다수


◆ 접근 가능한 화장실

안목해변 카페거리 다수


#휠체어타고방방곡곡 #무장애관광 #전윤선 #강릉카페거리 #커피 #안목해변 #장대비


https://www.imedialife.co.kr/news/articleView.html?idxno=52149


매거진의 이전글 긴 호흡의 시간, 캠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