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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초 Aug 13. 2020

결혼 이야기 1

일본 생활, 다섯









뭘 해도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는 사람과 변화에 능동적인 사람,

약한 불로 오랜 시간 정성스레 요리하는 사람과 몇 가지 요리를 한 번에 척척 해내는 사람,

실행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과 해보지 않은 일 앞에서 깊은 고민에 빠지는 사람,

누군가에게 털어놔야 속이 편한 사람과 자기만의 조용한 시간이 필요한 사람,

사람들의 시선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사람과 부끄럽고 쑥스러운 마음이 먼저인 사람,

몸에 열이 많아 사계절 뜨거운 사람과 여름에도 손발이 찬 사람,

대체로 감정적인 사람과 대체로 이성적인 사람,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과 그냥 옆에 있어주는 사람,

쓸데없는 걱정이 많은 사람과 중요하지 않은 일들에서 자유로운 사람,

뜨거운 욕조를 좋아하는 사람과 가벼운 샤워를 좋아하는 사람,

군것질을 좋아하는 사람과 삼시 세 끼면 충분한 사람,

식물을 잘 기르고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과 그런 데엔 영 능력이 없는 사람,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과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사람,

여러 분야를 경험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과 관심사가 뚜렷해 오랜 취미가 있는 사람.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함께 살며 상대의 좋은 점을 배우고, 자기의 부족한 면을 메꾸어가는 일. 그리고 그 안에서 똑같이 좋아하는 일을 발견하며 즐거워하는 일.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도 함께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가는 일.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수많은 새로운 일들을 함께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일.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들이 늘어나는 일. 눈 감는 날까지 내 옆에 있어 줄 좋은 친구를 만드는 일. 한 번뿐인 일생에 나도 그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 줄 수 있는 일. 결혼이란.
















  2013년, 러시아어를 배우기 위해 떠났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본인 남자 사람을 만났다. 그를 처음 만난 날을 잊을 수가 없다. 친한 사람들이 모여서 내 방에서 저녁을 먹던 날, 한국인 오빠가 자기 룸메이트가 왔다며 데려온 사람. 까무잡잡한 얼굴에 강한 인상, 거기에 어울리지 않게 아주아주 얇게 다듬은 눈썹, 긴 머리카락은 올려 묶어 사과머리를 하고, 목이 헐렁한 스트라이프 티셔츠에 너무 길어 밟히는지 뒤꿈치가 너덜너덜한 바지 차림이었다. 나이는 나보다 네 살이 많았는데, 그곳에서는 모두 친구였다. 식사를 마치고 친구들이 자기 방으로 돌아가는 걸 문 앞에서 배웅하는데, 그 친구가 갑자기 티셔츠를 휙 들어 올려 빵빵한 자기 배를 보여주었다. 배 부르게 잘 먹었다는 것 같았다. 처음 본 사람이 눈앞에서 배를 깐 적은 처음이었다. 아주 동물적인 표현이었다. 어쨌든, 그 친구는 술을 정말 좋아했고, 어디로 튈지 예측이 불가능했고, 야쿠자 같은 찐한 인상과는 다르게 심성이 착해서 누구에게나 인기가 있었다. 학생들은 거의 기숙사 생활을 했다. 우리는 말이 잘 통하지는 않았지만, 자주 함께 술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2014년, 그 친구와 함께 방을 쓰던 한국인 오빠가 한국으로 돌아갔다. 공항까지 배웅하러 와 준 그 친구가 많이 울었다면서, 기숙사에 돌아가면 잘 달래주라고 한국인 오빠는 떠나기 전에 나에게 전화를 했다. 퉁퉁부은 눈으로 돌아온 그 친구를 위해 요리를 했고, 슬픔을 위로해주었다. 그 친구의 노트북이 고장 나서 한번 내 노트북을 빌려주었는데, 유독 그 방이 와이파이가 잘 터져서 그냥 거기에 노트북을 아예 두고 필요할 때마다 가서 썼다. 우리는 잘 안 통하는 러시아어로 열심히 대화를 했다. 서로에 대해 알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그 친구가 고백을 했다. Would you be my girlfriend? 와, 내 인생 처음으로 들은 영어 고백이었다. 상대는 심지어 일본인이다. 멋지고 섹시한 근육질 러시아 남자와도 한번 사귀어보고 싶었는데 말이다. 나는 그 친구의 최대 약점인 술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앞으로 술과 나를 선택해야 할 상황에서 무조건 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약속을 받고 Yes를 했다. 그렇게 러시아에서 우리는 연인이 되어 5개월간의 즐거운 추억을 만들고, 유학 기간이 끝나 각자 나라로 돌아가 장거리 커플이 되었다.



  2017년, 나는 계약직으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일본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 고등학생 때부터 워킹홀리데이를 떠나고 싶었는데 그 나라가 일본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나는 후쿠시마 방사능 유출 문제에 관심이 많았기에, 남자 친구를 만나러 처음으로 일본에 가기 전에도 힘든 고민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일본에서 살아보고 싶은 생각보다는, 내 청춘을 정말 이 남자 한 사람에게만 쏟아부어도 되는 건지 확인하고 싶었다. 몇 년을 만났지만 아직도 잘 모르는 부분이 많다고 느꼈기에, 가까이에서 보고 나서 결혼이든 헤어짐이든 내 미래를 위해 결정을 내야겠다 하는 생각에서였다. 장거리 연애를 할 때에도 우리에게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워킹홀리데이 기간 동안 세 번의 큰 위기가 있었다. 다행히 잘 넘어갔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에 1년이 지나 내가 한국에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고, 우리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자 자기는 처음부터 결혼을 하고 싶었다면서 선택은 너에게 있다고 말하는 그와 결혼을 결심했다. 가까이에서 본 이 친구는 그냥 여태껏 내가 알던 모습과 똑같았다. 그래서인지 같이 있는 게 예전이랑 똑같이 좋았고, 이 친구가 없으면 앞으로 내 삶이 쓸쓸할 것 같았다.



  2018년 무더운 여름, 우리는 일본과 한국 두 나라에서 혼인신고를 했다. 그리고 나는 일본으로 시집을 왔다.








우리가 사랑한 블라디보스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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