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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찬란 Oct 06. 2016

내가 부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

저 앞의 선만 넘으면 왠지 부자가 될 것만 같은

돈을 모으는 방법 : 통장을 쪼개세요.

예: 생활비 통장, 비상금 통장, 정기적으로 돈이 빠져나가는 통장, 여행 통장  


 인터넷에서 시간 때우기 용으로 아무거나 눌러보다가 발견한 글. 돈을 모으기 위해서는 통장을 쪼개야 한다고 했다. 글쓴이는 쪼갠 통장을 통해서 돈을 (꽤 많이) 모았고 그 돈으로 정기적으로 여행도 다닌다고 했다. 돈 많고 건강한 백수가 꿈인 나는 얼마 안 되는 돈이라도 매달 쪼개고 모아서 여행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생각만으로도 나는 벌써 비행기 이륙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신나는 마음으로 통장을 만들기 위해 은행에 갔다.

은행에 가기 전에 어떻게 쪼갤 것인지 상세한 계획을 세웠다. 일단 매달 만원씩 넣고 있는 적금을 정기적 통장으로 넣고 교통카드는 생활비 통장과 연계해서 쓰자! 어떤 용도로 쓸 것인지 노트에 적었다. 은행에만 가면 유독 정신이 멍해져 횡설수설하기 때문에, 아예 미리 필요한 업무 내용들을 종이에 번호까지 매겨 적었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산 넘고 물을 건너서 은행에 갔다.

 오, 하필이면 월 말이라 사람도 엄청 많았다. 번호표를 뽑는 줄에도 한참, 그리고 창구 앞에서도 30분을 넘게 기다렸다. 아이고. 지루해서 앞에 나오는 광고도 보고 티브이 프로도 보고 엄마랑 통화도 했다. 적어온 쪽지에 모자란 것이 없는지 다시 확인하니 생활비를 목적으로 한 체크카드 통장이 아무래도 불안해서 다시 확인하고 교통카드라고 적었다. 5025번인 나는, 5024번에서 20분 전에 멈춘 전광판을 보며 따분하게 앉아서 사람으로 가득 찬 창구들을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5025번 고객님 6번 창구입니다."

 친절한 웃음을 머금은 직원이 나와 인연이 닿아서 참 좋다며 웃어주었다. 빈말이라도 기분이 좋다. 30분을 기다려서 앉자마자, 연습한 대로, 저 통장이 여러 개 필요해요. 체ㅋ.. 아 고객님 지금 통장 여러 개 못 만드세요. 키읔도 끝나기 전에 직원이 코팅이 빳빳이 된 종이 하나를 내 앞으로 내민다. 요즘 대포통장 때문에 금융감독원에서 내려왔다던 지시사항이다.

 입출금 통장을 만들려면 증명서가 필요했다. 급여 증명서라든지, 아파트 관리비 납부 명세서라든지. 급여도 받지 않고 단독 주택에 사는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증명서들이다. 집에서 순서까지 적고 앞으로 나는 돈을 어떻게 모을 것인지 계획까지 짜며 주황빛 미래를 꿈꾸던 나는 빠르게 쪼그라든다. 물론, 요즘 통장이 누구 할 것 없이 만들기가 어렵다지만, 오늘 내가 통장을 만들지 못하는 것은 그냥 내가 멀쩡한 직업 하나가 없다는 이유였다.

 요즘 누군가가 직업을 물어보면 참 애매할 때가 많다. 대학교를 졸업한지도 1년이 훌쩍 넘은 마당에 학생이라 하기도 애매하다. 휴학이라도 2년씩이나 하지 말걸. 그냥 간간하게 시험 준비하고 있어요.라고 대답하고는 했다. 그나마 가장 무난하고 그리고 짠내 나는 답변이다.

그 날 모든 사람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저 사람은 통장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일까?

 어쨌든 짠내 나고 돈 안 되는 직업을 가진 나는 결국 통장을 만들지 못한 채 좀 더 생각해보고 온다는 말을 남기고 일어섰다. 오늘따라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쪼리를 신고 온 게 왜인지 마음에 걸렸다.




- 정찬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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