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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찬란 Sep 09. 2015

노트북-비극적 요소 끝에 이루어 낸 희극적 결말


사랑이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정의하기 힘들어졌다. 사랑이란 뭘까.


  노트북은 많은 영화나 드라마, 책 속에서 비극적 요소로 활용되곤 하는 치매라는 요소를 사랑을 표현하는, 어쩌면 더 부각시키는 훌륭한 도구로서 이용했다. 자칫 평범해질 수 있었던 요소인 치매와 신분 차이가 있는 연애 스토리는 사랑스럽게 이 역할을 소화했던 레이첼 맥아담스를 통해 더 아련하고 아름답게 끝이 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노트북 이전의 레이첼 맥아담스의 영화인 '퀸카로 살아남는 법'에서의 얄밉고 악랄했던 그 모습은 이 영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도 없었다. 이 영화에서 레이첼 맥아담스는 '첫사랑'이라는 그 하나의 키워드만이 존재하는 역할로 완벽히 변신했다고 생각되었다.


1. Free

  노트북은 부모님의 철장에 갇힌, 자유를 갖고 싶은 앨리와 자유로운 삶을 사는 노아의 만남을 다루는 영화이다. 이러한 부잣집 딸과 가난한 집 아들 사이의 사랑 이야기는 자주 이용되곤 하는 소스이다. 이 영화 또한 남자 주인공의 여자 주인공에 대한 'What do you want?'가 영화 곳곳히 베어있고 결국 여자 주인공은 자유를 선택함으로서 이 전에 탄생했을 수 많은 결말을 답습한다.



  영화 곳곳에서 새와 그림, 배는 앨리에게 자유에 대한 갈망의 표현, 자유로움에 대한 표현, 자유로움으로 가는 탑승구의 역할을 각 각 하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앨리가 노아를 만났을 때만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앨리는 노아를 만나면서 그간에 경험해보지 못한 다양한 일탈을 겪는다. 그렇다면 앨리에게 일탈이란 무엇인가? 처음에는 앨리의 일탈은 당연히 노아를 만난 것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화를 감상할 수록 앨리에게 일탈은 단순히 '남자친구'가 아니라 공부를 안하고 그림을 그리거나 차도에 누워있는 것, 음악이 없는 길거리에서 춤을 추는 것 모두 부모의 기대와 자기 스스로에 대한 속박으로부터의 벗어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작품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주인공은 새와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새를 동경한다. 앨리 역시 노아와 간 바닷가에서 자신이 전생에 새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영화의 초반과 중간, 끝 등 곳곳이 삽입된 새가 날아다니는 장면은 갇혀 있는 앨리와 상반된, 새를 나타내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의 초반과 끝에 나오는, 앨리가 나이 든 후에 보는 새들은 천천히 날아서 지나간다. 앨리와 함께 하지도 않고 그림자만 남기고 떠난다. 그러나 중반부의 젊은 앨리가 새와 함게 하는 장면에서는 새가 빠르게 날아와 앨리와 함께 바다로 날아든다.

  새를 보는 것과 함께 하는 것. 자유를 보는 것과 갖는 것. 그 차이는 무엇일까



2. 17살과 여름, 그리고 첫사랑

  노아와 앨리가 처음 만난 건 17세, 앨리가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 여름 방학이다. 17세(우리나라 나이로 친다면 약 18세)는 얼마나 풋풋하고 아름다운, 낭랑한 18세인가. 일반적으로 17세의 사랑은 첫사랑으로 많이 일컫어 진다. 첫사랑과 17세의 사랑, 그것은 정말 그 나이와 그 순간에만 해볼 수 있는 사랑이다. 앨리의 부모님이 배를 타고 신나게 노는 앨리와 노아를 보며 '여름 한 때의 풋사랑이야.'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앨리와 노아의 사랑을 보면서 관객이 쉽게 빠지고 아련해질 수 있는 것도 바로 17세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여름의 사랑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면서도 짧은, 그야말로 방학 같은 사랑으로 많이 묘사된다. 때문에 여름이 '자유와 사랑의 계절'로서 이야기되고 있으며 이러한 이야기를 주제로 제작된 영화이자 뮤지컬 그리스를 통해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여름의 사랑이란 방학과 같은 것이라 계절이 지나고 휴가지에서의 일정이 끝나면 서로의 집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그런 사랑의 특성을 이 영화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한 여름의 로맨스는 갖가지 이유로 끝이 나지요. 하지만 나중에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어요. 별똥별같은 사랑으로 천상에서 내려온 눈부신 별 빛과 같아요. 잠깐 영원성을 발하다가 눈 깜작할 새에 사라지지요.


  노트북에 적힌, 그러니까 앨리가 쓴 노트북에 적힌 저 대사에서 가장 공감이 갔던 부분은 '잠깐의 영원성'이었다. 풋풋한 17세의 연애야 말로 잠깐의 영원성을 띄고 있다. 다른 나이의 사랑은 이 사랑의 끝이 언젠가는 올 것임을 알고 그에 대비해서 영원하지 않을 사랑을 주고 받는다. 그러나 17세의 사랑은 이 사랑의 끝을 생각하지 않고 영원이라는 헛된 약속을 하는, 그렇기 때문에 순수라고 칭해질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사랑일 것이다. 우리의 마음 속에 첫 사랑은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되고 추억이 되며 아련해지는 그런 것이 아닐까.



3. 의도적 구성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장면이 연결된다는 것이었다. 현재와 과거의 연결, 반대되는 상황을 연결한 의도적 구성이 서로의 상황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면서 안타까움까지도 느낄 정도로 다가왔다. 커다란 틀에서 생각하면 너무도 사랑하는 젊은 노아와 앨리, 그리고 노아를 전혀 알지 못하는 앨리와 책을 읽어주는 노아 사이의 연결은 특히 상반된 각 각의 상황을 점진적으로 강력하게 연결해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애 초기 극장에서 노아와 앨리가 만나는 장면 역시 노아와 앨리 사이의 어색함과 핀과 새라 사이의 사이를 극명하게 대비해주는 화면의 구성이었다. 앵글은 그들의 뒤에서 그들을 찍고 있는 데, 화면만 밝게 빛나는 어두운 극장 안에서 한 쪽은 입을 맞추고 있고 다른 한 쪽은 어색하게 영화를 보는, 그 와중에 노아가 앨리에게 접촉하려하는 화면 구성은 현재 상황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과거 회상류의 액자식 구성의 영화는 영화의 몰입도를 저해하는 경향이 있어 선호하는 편은 아닌 데 이 영화는 이러한 회상 장면을 통하여 17세의 노아와 앨리, 24세의 노아와 앨리, 노년의 노아와 앨리의 각 각 다른 마음들을 느낄 수 있어서 다양한 느낌 속에서 감상할 수 있었다.

 

4. 차를 타는 대상

 영화에서 앨리와 노아는 싸운 후 각 각 한 번씩 자신의 차를 타고 상대를 떠난다. 두 번 모두 이유는 앨리가 대학과 결혼을 이유로 노아의 곁은 떠나야 한다는 것 때문이다. 17세의 앨리는 외부적 상황에 더 영향을 많이 받고 결국 헤어지게 되지만, 24세의 앨리는 결국 노아를 선택하게 된다는 차이점이 있다.

 차를 타는 대상이 바뀌는 것은 설득하는 대상도 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앨리가 떠나는 것은 똑같지만 첫번째에는 앨리가 분노를 표출하다가 애원하는 양상으로 진행되지만 두 번째에는 노아가 화를 내가다 프로포즈를 하는 양상으로 진행된다. 이전의 싸움은 첫사랑의 마음에서 주고 받을 수 있는 분노가 표출되는 싸움이었고 불 같은 사랑에 대한 다툼이라면 두 번째의 싸움은 사랑의 기쁨과 아픔, 기다림을 겪은 그들의 성숙이 나타난 다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원래 이렇게 싸우잖아. 넌 날 망할 자식이라고 하고 난 널 구제불능이라고 하지. 뒤끝없고 돌아서면 다시 구제불능인게 너니까. 쉽진 않고 무척 어렵겠지. 매일 이래야 할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아. 네 모든 걸 원하고 영원히, 너와 매일 같이 있고 싶으니까. 한 가지만 해볼래? 네 인생을 상상해 봐. 30년 후, 40년 후 넌 누구와 함께야? 그게 론이라면, 가. 난 널 한 번 잃어봤으니 난 다시 해볼 수 있어. 네 맘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


 싸움 이후의 장면을 통해서 이 영화의 줄거리가 앨리의 관점에서 쓰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앨리가 없던 시절의 노아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통해 전해진 만큼으로만 표현되었고 그 이상에서 노아의 감정이 표현됨은 없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 앨리의 감정은 이 작품의 시점이 앨리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단 하나의 사람만을 사랑하고 그와 함께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분명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랑은 책으로 쓰여지고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랑하던 감정의 부재를 느낀다는 것은 너무도 쓸쓸한 감정이다. 이런 경험의 종말시점에 대한 확실한 안내가 없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너무도 무모하고 아프다. 그런 관점에서 나는 앨리가 부러워졌고 노아가 부러웠다.

  17세의 노아, 24세의 노아, 할아버지 노아 모두 같은 시간 속의 앨리를 너무도 사랑한다. 떠난 24세의 앨리를 잡은 건 17세의 노아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을 말하는, 사랑을 주고 싶었다는 노아의 편지를 통해 저런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을 부르짖을 수 있는 사랑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모든 장면이 먹먹했지만 17세 노아의 편지는 너무도 먹먹했다.

 

  우리 사이가 끝났다고 생각하니 잠이 안 왔어. 진실한 사랑을 했으니 씁쓸한 건 없어. 미래에 먼발치에서 서로의 새로운 인생을 보면 기쁨으로 미소짓겠지. 그 여름, 나무 아래서 같이 보냈던 시간과 사랑하며 성숙했던 과거를 추억하면서. 최고의 사랑은 영혼을 일깨우고 더 많이 소망하게 하고 가슴엔 열정을 마음엔 평화를 주지. 난 네게서 그걸 얻었고 나는 너에게 그걸 주고 싶었어.



 

 천상병 시인의 '귀천'처럼 세상을 소풍처럼 왔다가 가는, 돌아가서 이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삶은 참 행복한 삶일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그런 소풍을 함께 할 단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 순간 함께 손을 잡을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정찬란 남김

-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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