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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Feb 09. 2021

춥고 배고팠던 수습기자

성동경찰서 수습기자실 전경


어느덧 기자질도 9년차에 접어들었다. 기레기라 욕먹고 심적으로 지칠때마다 항상 수습때를 떠올린다. 주 52시간 근로제도와 코로나19 국면이 맞물려 기자들의 수습 문화도 많이 바뀌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전통적인 수습 교육은 맞지 않는 옷이다. 사람을 극한으로 몰아내면서 근성과 악바리를 끌어내는 전략은 시대착오적이다. 지면보다 온라인, SNS가 중요해지듯 저널리즘도 그 모양과 형태를 달리하며 진화해간다.


꼰대가 된걸까. 그래도 여전히 수습 시절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토록 하고 싶던 기자의 꿈을 안고 처음으로 경찰서에 발을 디디며 사회물을 빼던 그 순간순간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돌아보면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했나 싶지만 그런 밑바닥 경험이 모이고 쌓여 사회의 단면을 보는 눈을 길러준 것 같다. 굳이 기자만이겠나. 초년병은 혹독한 사회에서 혼나고 상처받으며 단단해진다. 네이버 my box를 정리하다 우연히 수습 시절 사진 몇개를 발견한 김에 기억나는 수습 에피소드를 정리해보려 한다.



입사 후 2013년 2월 1일 부터 약 한달간 사내 교육을 받았다. 각 부서를 돌았고, 국정원 견학도 하고 부검도 보고, 사격도 했다. 곧 수습의 꽃이라고 하는 사츠마와리가 다가왔다. 아직도 우리 언론계는 일본 용어를 쓴다. 혁파해야 하지만 우리네 언론문화가 일본영향을 많이 받아서 아직도 쓴다. 사츠마와리는 경찰서를 계속 도는 것을 뜻한다. 하리꼬미는 경찰서에서 먹고자는 행위를 일컫는다. 요새는 52시간 근무제때문에 경찰서 숙식 생활이 불가능하다. 다만 8년 전에는 대부분의 수습 기자가 경찰서에서 생활하며 기본적인 취재소양을 익혔다.


처음으로 경찰서에 투입되던 날. 팀장(보통 캡이라고 한다)과 일진 선배들과 함께 술을 진탕 먹고 서울 성동경찰서로 향했다. 서울시내에는 8개의 경찰 라인이 있는데, 나는 성동라인을 맡았다. 성동경찰서 강동경찰서 광진경찰서 건국대 등이 포함돼 있다. 만취상태에서 경찰서 앞에 당도했는데 너무 막막했다. 경찰들도 너무 무서워 보였다. 오후 8시에 첫 임무를 시작했는데 오후 9시에 사건을 보고해야 했다. 형사과에 갔더니 데스크가 "들어오지 마세요. 여기가 아무나 들어오는 곳인줄 압니까"라고 했다. 주눅 들어서 한시간 가량 민원인실에 앉아있는데 곧 보고시간이 다가왔다. "선배 죄송합니다 제가 형사과에 못들어갔습니다"라고 하자 선배가 "그건 니 사정이고. 한 시간동안 넌 뭘했느냐"고 했다. 할말이 없었다.


경찰서 쓰레기통 뒤져서 조각 맞추기..


난 결국 첫날 아무것도 못하고 '무능력하다'고 욕을 먹었다. 술김도 있었지만 도저히 경찰 형사과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쎄보이는 형사들 사이에서 초딩같은 나는 도저히 뭘 할 수가 없었다. 선배는 뭐라고 하지, 경찰들은 싸늘하지 중간에서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서 하염없이 울다가 성동 경찰서 수습기자실로 올라갔다.


기자실엔 나 혼자가 아니었다. 타 방송사와 통신사 수습이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어색하게 인사를 나눈 뒤 그들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나는 아무것도 못했는데 그들은 뭔가 취재한 걸 열심히 정리하고 있었다. 대단해 보였다. 각각 온지 한달, 2주가 됐다고 한다. 그들에게 "어떻게 취재를 하느냐"고 묻자 "열심히 하면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미묘한 신경전이 읽혔다. 나도 질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수습의 하루는 이랬다. 우선 오전 4시에 기상한다. 잠이 부족하다. 전날 새벽 2시에 잤기 때문이다. 마지막 보고가 새벽 1시인데, 선배들은 보고거리가 없으면 한번 더 취재를 시켰다. 지시를 따르면 새벽 2시가 조금 넘는다. 대충 경찰서 세면실에서 발과 얼굴을 씻고 자다가 2시간만에 깬다. 4시에 일어나야 맡은 경찰 라인의 경찰서를 다 돌 수 있다. 택시를 잡고 경찰서에 가는 동안 틈을 내서 잔다. 경찰서에 가도 보고할 만한 사건이 바로 나오지 않는다. 우선 교통조사계에 간다. 택시폭행 등은 기사가 되지 않는다. 면피로 하나씩 챙겨놓지만, 그나마도 교조계에 마음씨 좋은 경찰이 있어야 가능하다. 강력계는 입장이 안되고, 형사계도 마찬가지다. 허둥대다 보면 오전 6시, 첫 보고 시간이 다가온다.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재밌는 기사거리가 없는 상황에서 택시 폭행만 보고하면 무조건 불호령이 떨어질텐데 다른 건수를 잡기가 힘들다.


종암경찰서 2진기자실의 장엄한.. 모습


6시가 된다. 땡 치자마자 선배에게 전화를 한다. 긴장된 통화연결음이 울리고 선배가 전화를 받는다. "어" "22기 수습 박세환입니다. 보고드리겠습니다." "어 보고해봐" 보고는 기사형식으로 한다. 서울 XX경찰서는 X일 X씨를 ~~혐의로 입건해 조사중입니다. X씨는 X시 X분 XX 근처에서~~" 손을 떨며 수첩을 보며 읽다보면 선배가 제지한다. 그건 뭔데? 그게 얘기가 되냐? 그 부분이 제일 중요한데 더 취재해봐. 이 정도면 양호하다. 사건이 없거나 매일 똑같이 택폭만 보고하면 불호령이 떨어진다.


보통 첫 보고가 끝나면 일진 선배가 2시간 가량을 더 준다. 어차피 수습이 취재하는 건 크게 얘기가 되지 않기 때문에 추가 취재를 통해서 3매 짜리 기사를 한번 써보라는 것이다. 근데 사실 시간을 더 준다고 취재가 되는 건 아니다. 새벽에 불쌍한 수습을 위해 택시폭행 사건이라도 알려준 착한 데스크 경찰분은 교대를 했고 형사과 강력계는 굳건히 닫혀있다. 아무리 해도 추가 취재가 안됐는데 8시가 다가온다. 또 혼나고 더 알아보겠다고 하고.. 1시간 마다 해야하는 보고 시간이 왜 이리 빨리 다가오는지. 하루가 참 빨리간다. 동시에 참 시간이 안 간다.


내곡동 국가정보원 입구


기본적인 수습의 루트는 경찰서를 돌며 사건을 발굴하는 것이다. 다만 사건팀 차원에서 진행하는 기사가 있으면 그때그때 해당취재도 간다. 국가정보원 압수수색이 진행되던 날이었다. 아침보고를 끝내고 경찰서 구내식당에서 밥 한숟갈을 떴는데 바로 일진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국정원으로 가" "네?" "지금 빨리 택시타고 국정원으로 가라고" 경찰서를 나와서 택시를 잡았다. "국정원으로 가주세요"하니까 택시기사님이 뒤를 돌아봤다. "거기가 어딘데요?" 국정원은 네비를 쳐도 안 나온다. 결국 수소문해서 내곡동 주차장에 가달라고 했다.


이미 국정원 앞에는 취재진이 진을 치고 있었다. 보아하니 수습은 나밖에 없었다. 한 유력 통신사 기자가 내게 명함을 주며 "어디매체에요?"라고 물었다. 수습이라고 했더니 그 분은 "아 수습..."이라며 갑자기 고개를 돌려 저쪽으로 갔다. 아무래도 타사도 일진과 수습과 구분이 명확한 듯 했다. 상처받은 마음을 뒤로하고 계속 검찰 버스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1시간, 2시간이 지나도 버스는 나올 생각을 안 했다. 화장실 갔을때 검찰 버스가 나올까봐 그 자리에서 꼼짝않고 기다렸다. 밤이 됐는데도 버스가 안 보였다. 아침도 못먹고 거의 10시간 넘게 서있으려니 정말 진이 빠졌다.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아직이냐?" "네" "근데 너 밥은먹었어?" 선배가 묻는 순간 왈칵하고 눈물이 쏟아졌다. 대답을 잘 못하자 "야 니가 알아서 밥은 챙겨 먹어야지" 했다. 바로 옆에 있는 비빔밥집에 들어가 1만 5000원짜리 육회 비빔밥 2개를 시켰다. 거의 10분 만에 마시듯이 먹고 나왔다.


2시간을 더 기다려서야 국정원 버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파란 박스가 몇개인지, 파견 수사관이 몇명인지 세고 선배에게 보고를 했다. "경찰서 복귀해서 다시 마와리 돌아"라는 선배의 대답에 택시를 타고 라인으로 복귀했다. 별거아닌 정보라도 얻기 위해 참고 견디는 것, 그것이 수습의 사명이었다.


경찰서 구내식당 아침밥. 3000원이다.


5달에 걸친 수습 기간동안 항상 배가 고팠다. 뭐 딱히 하는 것도 없는데 춥고 배고팠다. 오전 6시와 7시, 8시 아침보고를 끝내고 경찰서 구내식당에서 먹는 밥은 정말 맛있었다. 배식하는 여사님들과도 친해졌는데 "좀 씻고 다니라"면서 반찬을 더 주셨다. 언제 또 선배에게 전화가 올지 긴장하면서 밥을 먹었지만 그나마 30분 남짓한 그 식사시간이 너무 좋았다. 아침을 먹지 않으면 하루종일 기운이 없어서 꼭 뭐라도 먹어야 했다.


경찰서 구내식당 아침밥 2. 너무 맛있다..


수습은 경찰서를 돌며 취재를 한다. 경찰관과 친해져서 사건을 단독 취재하면 최고지만, 사실 피의사실공표죄도 있고 개인정보 보호 탓에 취재는 참 쉽지가 않다. 그래서 수습들은 주로 민원인 취재를 많이 한다. 와서 앉아있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것도 어렵다. 사와리 좋게 얘기도 들어주고 하다보면 좀 얘기가 되는 것 같은 건이 있다. 이때 무리해서 기사를 쓰면 안된다. 경찰이 수사한 내용도 아니고 일방적인 주장이라서다. 근데 수습들은 이걸 잘 모른다. 한쪽 얘기가 정답인줄 알고 한쪽 말만 듣고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보고한다. 경찰 수사는 정반대로 나온다. 이런걸 직접 피부로 느끼면서 기사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기사의 중요성과 무게를 몸소 깨닫는다. 몸으로 부딪치고 자신이 무너지고 깨닫고 하면서 성장한다. 수습 기간은 이렇듯 확신과 자신에 차있는 일개 대학 졸업생을 한 사람의 기자로 성장시키는 과정이다.


한 경찰서에 붙어있던 경찰 계급. 무조건 외워두고 어리바리 하지 않아야 한다..


수습 때 기억남는 취재가 두개 있다. 고시원에 살며 건설 노동자로 살던 사람이 사망했는데, 뭔가 석연치 않았다. A씨는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엘리트였는데 노가다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의 형이 사망 세달 전에 그의 이름으로 보험을 들었는데 세달만에 한강에 빠진 채로 발견됐다. 민원인에게 취재를 해서 경찰에 확인하는 식으로 취재했다. 당시 경찰과의 대화를 옮겨 본다.




=아니 그런 거 다 어떻게 알았나. 경찰이 말해줬나? (팀원들 보며) 야, 어떤 놈이 말했어?”


-하체가 부실했다는 A씨가 어떻게 한강까지 갔나.

=우리는 잘 모른다. 지나가던 행인이 시체를 발견해서 119에 신고한 거다.


-A씨의 형이 사망 2-3달전에 A씨 보험을 들었는데.

=보험 들었다는 사실은 처음 들었다.


-주위 사람들 진술로는 A씨 성격이 낙천적이라 자살할 사람은 절대 아니라고 했다.

=기자들은 너무 한 사람의 죽음을 이분법적으로 보는거 같아. 자살 혹은 타살로. 우리는 죽음 자체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돼. 큰 틀에서 봐야지.


-왜 부검안했나.

=외상도 없고, 우리가 판단했을 때 부검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아서...


-통상적으로 익사한 시체는 다른 사인이 있는지 아니면 언제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국과수에서 부검을 하는데.

=그거야 우리도 잘 모르지.




선배에게 보고하고 A씨가 머물던 고시원에 가서 이웃들의 증언을 들었다. A씨 장례식장에 가서 형과 형수의 얘기도 들었다. A씨는 평소 런닝 차림에 파란 슬리퍼를 자주 신었는데 경찰이 확인한 한강 근처 CCTV에 포착된 A씨는 멀끔한 양복차림이었다. A씨의 형이 A씨 명의의 보험금을 수령했는지는 확인 못했다. 경찰도 그냥 자살로 보고 내사종결했다. 한 사람의 죽음은 그렇게 처리됐다. 한 경찰은 말했다. "이런 죽음이 서울시내 전역에 하루에만 10건이 넘어요. 10건이 뭐야 많을때는 50건도 됩니다. 사연없는 죽음은 없다지만, 모든 사안에 대해 의심을 품을 필요도 없어요." 뭔가 느낀 게 많았던 취재였다.

   

강동경찰서 한편에 놓여있던 트럭.


또 하나의 사건. 어김없이 마와리를 도는데 강동경찰서에 수상한 트럭하나가 놓여있었다. 경찰들이 트럭에 있던 철판(하수구 위에 놓는)을 옮기고 있었다. 이게 뭐냐고 물어봐도 답을 안해줬다. 그러다 옮기던 순경에게 물어봤는데 누가 이걸 훔쳐서 팔다가 걸렸다고 했다. 그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계속 캐물으니 해당 철판이 뜯긴 위치를 말해줬다.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현장에 가보니 경찰 뿐 아니라 강동구청 직원들이 나와서 점검중이었다. 경찰보다 공무원이 좀 더 접근이 쉽다. 생각보다 술술 피해현황과 수법을 말해줬다. 범인이 새벽에 트럭을 끌고와서 공물인 철판을 뜯어다가 팔았단다. 피해가 300만원 정도였지만 수습 바이라인을 달고 처음으로 기사를 썼다. 그 때 느낀 것은, 뭔가 하나를 취재하다 막히면 포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쪽도 알아보고 구청과 소방서도 가보고, 민원인도 만나고, 인터넷도 뒤지다보면 어딘가 길이 있다. 수습 시절은 뭐라도 해보려 노력하는 시기다. 포기하기 보단 다른 방법 알아보겠습니다 하는 근성을 키우는 시간이다. 경찰서 쓰레기장을 뒤져서 종이를 끼워맞추다가 온 손에 똥 휴지 범벅이 된 기억도 난다. 웃프다..



경찰서에 갓 투입된 수습들은 주로 교통조사계에 간다. 택시폭행, 주취 폭행 등 이른바 면피 사건을 받을 수 있기때문이다. 한달이 지나 좀 익숙해지면 이제 형사과나 강력계를 간다. 선배들이 슬슬 얘기되는 강력 사건을 요구하지만 취재가 쉽지는 않다. 난 강력계 형사분들이 너무 무서웠다. 우락부락한 외모에 건장한 체격으로 "나가세요" 하면 바로 도망치기 일쑤였다. 그래도 일부 따뜻한 분들도 있었다. 사건을 주지는 않았지만 커피를 주거나 간식을 나눠줬다. 그것만으로도 눈물나게 고마웠다. 그만큼 심신이 지쳐있었다.


경찰 아저씨가 준 빵. 너무 맛있었다


좀 머리가 굵은 수습들은 정보과, 지능팀도 간다. 역시 접근이 어렵지만 지능적으로 행동한다. 정보과는 첩보와 집회시위 등을 담당하는데 일부러 집회에 나가서 관리하는 경찰들에게 명함을 주고 친해지는 경우가 있다. 정보과 등은 관할 사건등을 꿰고 있기때문에 중요한 부서지만 역시 기자들에게 적대적이다. 아니 모든 부서가 적대적이긴 하다.. 매일 쪽잠을 자며 보고하고, 혼나고, 취재하고, 가끔 단독 얻어걸리고, 경찰이나 소방관, 구청 직원들과 부대끼며 조금 친해질라치면 수습이 끝난다. 참 힘들고 고되지만 뭔가 남는 시간이었다..고 자위한다.



수습 기간 크고 작은 사고가 많았다. 너무 피곤해서 시도때도 없이 코피가 났고, 브리핑에 늦어서 뛰다가 다리를 삐어서 병원 신세도 졌다. 그래도 우리 동기 모두 큰 사고없이 무사히 수습을 마친게 감사했던 것 같다.


수습 시절 이틀에 한번은 흘린 코피


인터뷰중에 코피가 나서 황당했던 적도 있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주 52시간 근로제와 코로나19 탓에 과거 야만스러웠던 수습 교육은 사라졌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사회가 선진화되듯이 언론계도 변해야 한다. 다만 24시간 경찰서에서 먹고자고 하면서 고생하면서 경찰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어두운면을 더 빨리 목도하고 적응한 측면은 분명히 있다. 내가 얼마나 무능력한지 깨닫는 동시에 또 열심히 뛰면 남들이 모르는 사실도 발굴할 수 있겠구나, 자신을 가질 수 있었다. 보고 거리가 없으면 또 불호령이 떨어지니 달려오는 차에 뛰어들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언제또 이런 극한의 경험을 해보겠나 싶기도 했다. 내 자신의 한계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다시는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다 ^^



넘어져서 부은 발. 그래도 덕분에 하루 쉬었다. 너무 좋았다...


아직도 언론계에선 "너 마와리 해봤어" 하는 분위기가 많다. 일본에서 넘어온 마와리를 체계적인 교육으로 착각하는 측면도 있지만, 그만큼 마와리를 통과한 기자를 근성있게 쳐주는 분위기다. 이제 이런 관행도 점차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앞으로도 굳이 노동법을 위반해가면서 위험하게 잠도 안재우고 돌리는 이런 교육법은 사라지고 좀더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수습 교육 시스템이 마련될 것이다. 아재들만 나때는 말이야~ 하며 수습 교육을 무용담처럼 늘어놓는 떄도 올 것이다. 그래도 난 5개월 열심히 일했고 내 자신이 자랑스럽다. 그때 단련한 멘탈과 근성으로 평생 살아갈 듯 하다.



누군가 물었다. 그렇게 비인간적으로 굴리는데 왜 안 그만둬? 근데 난 이걸 못견디면 어디서든 못 견딘다고 생각했다. 혼나고 또 혼나도 재미있었다. 내가 하는만큼 결과가 나왔다. 선배가 책임져주지 못한다. 내가 주도하고 내가 취재하고 내가 기사를 쓰고 내 바이라인으로 기사가 나간다. 입사하자마자 책임을 주는 언론사가 좋았다. 여전하다. 돈도 적고 욕 먹고 이제 언론개혁으로 기레기들이 개혁의 대상이 되었지만 여전히 난 이 직업이 좋다. 피가 나고 다리를 삐어도 포기는 절대 생각조차 안했던만큼 앞으로도 포기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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