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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Aug 11. 2023

민희의 삶 (1)


민희(31)는 육지와 연결된 한 섬에서 태어났다. 외동딸이었다. 죽순 농사를 주로 짓는 곳이었다. 봄만 되면 단단한 죽순이 땅위로 불쑥 솟아 올라왔다. 민희의 어머니는 민희를 뒤로 안고 죽순을 채취했다. 민희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빵끗 웃었다.


민희는 부모와 다르게 피부가 좋았고 예뻤다. 어릴 때부터 서울 사람 같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 동네에서 '도시적으로 생겼다'는 것은 가장 훌륭한 칭찬이었다. 하도 주변에서 칭찬이 쏟아지니 민희의 부모는 좀 우쭐해졌다. 죽순 냄새가 밴 손을 씻으면서 민희 아버지는 부인에게 "오디션이나 한번 보게 해주자"고 했다. 민희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일이었다. 민희의 가족은 부푼 꿈을 안고 인근 대도시에서 열린 중소기획사의 공개 오디션에 참가했다. 그러나 민희는 보기좋게 떨어졌다. 섬에서야 민희는 공주였지만 넓은 무대에선 그저 그런 평범한 아이였기 때문이다. 민희는 울었고 부모는 다른 기회를 노려보자며 다독였다. 그러나 다음번 기회는 없었다.


민희는 중학교에 입학한 뒤 소위 일진이 됐다. 남녀 공학이었다. 잘생기거나 예쁘거나, 재미있거나 싸움을 잘 하면 일진이 될 수 있었다. 민희는 같은 학교를 넘어 주변 학교 남자애들이 자신을 보러 찾아오는 것이 좋았다. 누구는 민희 보고 화장을 안하면 수지, 화장을 하면 현아를 닮았다고 했다. 노는 오빠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하굣길에 민희를 기다렸다. 엄마 화장대에서 훔쳐 온 립밤을 바른 민희는 그때마다 싱긋 웃었다. 노래방과 오락실, 빵집을 넘어 나이트도 다녔다. 술과 담배를 배웠고 어린 나이에 동네에서 가장 잘생긴 오빠와 잠자리도 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성인의 삶을 배웠다. 사실 공부만 하기에는 참 따분한 동네였다. 잘 풀려서 서울로 대학을 간 대도 부모가 등록금을 대줄 형편도 안 됐다. 민희 엄마는 민희에게 그저 좋은 사람 만나서 시집이나 잘 가는게 가장 행복한 길이라고 했다. 그러기엔 민희는 너무 예뻤다.


수학여행을 가면 민희와 일진들은 가장 뒷자리에 앉았다. 노래방이 연결되면 갓 데뷔한 원더걸스의 '아이러니'를 불렀다. 민희는 썩 노래를 잘했다. 젊을 때 섬을 주름잡았던 엄마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이라고들 했다. 민희는 엄마가 좋아하던 심수봉의 노래도, 꺽다리 미녀 김현정의 노래도 곧잘 불렀다. 


민희가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곧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매일 술을 마셨다. 민희는 집에 가기 싫었다.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거나 빼앗아서 노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그러다 고3이 됐고, 대학은 생각도 못했다. 수능을 봤는데 처참한 성적이 나왔다. 아버지는 대뜸 통장을 내밀었다. 너 대학가라고 엄마가 모은 거야, 라고 했다. 그래도 민희는 공부할 생각이 없었다. 대신 이 지겨운 섬을 뜨고 싶었다. 서울에 가서 재수학원에 다니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민희를 읍내에 데리고 가서 소고기를 사주었다. 아버지가 잘라주는 소고기에선 죽순 냄새가 났다. 민희도 소주 한잔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민희는 그날을 잊을 수 없다. 고속버스를 타고 5시간을 달려 서울 고속터미널에 내렸던 날 말이다. 발 디딜틈 없는 인파 사이에서 민희는 해방감을 느꼈다. 동시에 위기도 느꼈다. 너무 예쁘고 잘생긴 사람이 많은 것 같았다. 공부할 생각은 없어지만 학원은 한번 다녀볼 요량이었다. 유명한 학원들은 입학 컷부터가 너무 높았다. 간신히 강남에 위치한 한 학원의 최하급 반에 등록을 했다. 죽순 수백개를 팔아야 나올 돈으로 학원비를 내고 하숙비도 냈다. 홀로맞는 서울에서의 첫날밤에 민희는 라디오를 들으며 왠지 모를 외로움에 몸을 떨었다. 


예상대로 민희의 수험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민희는 4월에 게임에 빠졌다. PC방에서 밤을 새며 온라인 게임을 하고 낮에는 학원에 와서 잤다. 6월에는 연애를 시작했다. 상대는 살짝 고수를 닮은 서울 깍쟁이였다. 남친도 재수생이었다. 남친의 집은 썩 잘 살았다. 발렌시아가 트리플S도 자주 신었다. 그는 민희에게 처음으로 오마카세를 사줬다. 맛도 맛이지만 음식도 설명해주고, 처음으로 대접받는 느낌이 민희는 싫지 않았다. 남친도 강남역 근처에서 자취를 했다. 민희는 그 집에 자주갔다. 서울 사람의 다정한 말투도 좋았다. 그러나 그는 수능이 끝나고 명문대에 붙자마자 민희와 헤어졌다. 민희는 그 해 수능을 또 망쳤다. 아버지에게 전화가 와서 대충 둘러댔다. 엄마가 애써서 번 돈이 허공으로 사라지자 자책감이 들었지만 차라리 빨리 취직을 해서 성공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래서 아빠에겐 우연히 학원에서 좋은 친구들을 알게됐고, 그 집 아버지 회사 등에 좋은 자리를 주선해줬다고 거짓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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