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동료가 최근 한 말이 가슴에 남았다.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게 하나도 없고, 계속 나가기만 한다는 말이었다. 정말 맞는 말 같다.
기자가 출입처를 배정받으면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한다. 정신없이 브리핑과 술자리, 물 먹는 나날과 취재가 이어지다보면 훌쩍 1~2년이 흐른다. 또 인사가 나고, 새로운 출입처로 향하면 다시 고된 적응의 나날이 이어진다.
그렇게 세월이 쌓여가는 도중에 물론 소중한 인맥이 남는다. 다만 자꾸 마음이 허한 것은 나만의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는 지식이나 경험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내가 맡은 분야 사람들의 관계나 이슈 말고, 마치 경제의 펀터멘털처럼 내가 이 세상과 사회에 발 딛고 계속 살아갈 힘이되는 그런 저변의 지식들 말이다. 학창시절과 대학 생활을 거치며 어리고 서툴지만 열심히 쌓아왔던 세상을 대하는 나만의 방식이나 기준이 자꾸 풍화되어 간다는 아쉬움을 지울수가 없다. 대부분의 언론인이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선택한 게 대학원이었다. 지난해 기획재정부 출입할 당시, 세종 거주라는 점을 활용해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에 지원했고, 합격했다. KDI에 대해 잠시 설명을 하면 정부가 설립한 국내 최초의 싱크탱크다. 세종시에 위치해 있다. 거시경제나 금융, 재정, 노동, 산업, 무역, 사회보장, 북한경제 등 경제 사회 연구를 통해 정부의 정책 수립과 제도 개혁에 기여하자는 취지로 설립됐다. 특히 예비타당성조사를 전담하는 기관이기도 하다. 500억원 이상의 국비가 들어가는 국책사업에 대해 KDI 내 공공투자센터에서 예타를 진행하고, 이에 따라 사업 진행 여부가 결정된다.
KDI 출신 가운데는 정부에서 요직을 거친 이들이 많다. 김만제 경제부총리, 사공일 무역협회장,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송병락 서울대 명예교수 등등. 유승민 / 이혜훈 전 의원도 KDI에서 연구위원으로 활동했고. 윤희숙 전 의원도 이 기관 출신이다.
이런 KDI에서 몇년전 국가정책학 석사 과정을 신설했다. 학부를 졸업한 일반 대학원생과 달리 정부나 공공기관, 시민단체, 언론 등에서 일하는 직장인을 대상으로 하는 과정이다. 세종에 내려간 나는 이곳에서 뭐라도 남긴 뒤에 다시 서울로 올라가자는 생각을 했고, 다양한 기자와 공무원들의 조언을 들어 KDI 대학원을 지원하게 됐다.
결론만 말하자면 너무 잘한 선택이었다. 직장인의 스케쥴을 고려해 금요일 저녁과 토요일 하루 종일 대학원 수업이 진행됐다. 과목도 다양했다. 인구 문제의 해법, 지속가능한 정책 입안의 어려움, 통계적으로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등등. 대학시절 이후 처음으로 조를 나눠서 주제발표도 했다. 행정안전부가 발간한 혁신 공공기관 사례집을 보고 해당 조직은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혁신을 이뤘는가 분석하는 수업이었다. 그렇게 발견한 공식을 각자가 몸담은 조직에서 어떻게 적용시킬수 있을지 논의하는 시간도 있었다. 경제학이나 통계학과 관련한 기본적인 수업들도 커리큘럼에 포함됐다.
당시 나는 금요일과 토요일에 쉬고, 일요일에는 월요일자 신문을 만들기 위해 출근하는 루틴이었는데 꽤나 피곤했던 기억이 난다. 주7일 근무같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무언가를 배우고 내 안에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쌓아가고 있다는 뿌듯함도 느껴졌다. 단순히 석사 학위를 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와 비슷하게 어찌보면 공적인 영역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과 고충, 고민을 나누고 함께 해법을 고민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사건팀장 직을 맡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일단 휴학을 했지만.. 곧 다시 복학을 할 계획이다. 서울에서 세종까지 주말에 왔다갔다 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보통 기자들에게 대학원은 자기개발 방법 가운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수단이다. 언론인에게 일부 혜택을 주는 대학원도 있다. 카이스트 테크노경영 대학원이나 위에 언급한 KDI 대학원 등등. 언론홍보대학원도 있지만, 사실 현직 기자로서 그곳에선 크게 배울게 없는 것 같다. 만약 국방이나 북한쪽에 관심이 있는 기자라면 북한대학원대학교 대학원이나 국방대학원도 추천할 만 하다. 일부 선배들은 방송통신대 대학원도 다니는 걸로 알고 있다. 아무래도 기자를 배려해 주말에 대학원 수업이 있거나 한 대학원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일과 학업을 병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언론사 내부에선 미묘한 꺼림이 느껴진다. 만약 팀원 누군가가 대학원에 등록한다고 하면 "일에 지장 없는 거 맞아?" 하는 식이다. 기자 개인의 역량이나 안목이 중요하고, 이런 기자들을 통해 먹고사는 언론사의 반응치곤 좀 신기하다. 나의 역량을 넓히고, 지식을 쌓기 위해 대학원에 다닌다고 하면 윗선에선 바로 업무에 소홀해지는 것 아니냐 하고 걱정을 한다. 그래서 기자들은 대부분 조용히 쉬쉬하며 석사학위를 준비하는 경우가 많다. 자기개발을 숨어서 해야 하는 것이다. 박사 준비는 더 불가능해 보인다. 아예 일주일 내내 박사 준비에 올인해야 하는데 그럴 시간적 여유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학위 빼고는 기자가 스스로 재교육을 할 수 있는 수단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자신의 책을 낼 수도 있겠다. 다만 그건 기자로서의 경험을 썼다기 보다 기존에 본인의 생각이나 경험을 담은 경우가 많다. 아니면 기자로 일하면서 한 분야에 흥미를 느끼고, 수년간 전문성을 쌓은 뒤 그 분야에 관한 책을 쓸수도 있다. 다만 쉽지는 않은 일 같다. 꼼꼼히 기록도 해 놔야 하고, 모든 기자에게 출판의 기회가 찾아오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을 쓰는 것은 자기 개발이라기 보다 뭔가 노후 준비 수단이나 강연 기회를 넓히는 느낌이 더 강하다.
한국기자협회나 한국언론진흥재단 등이 주관하는 언론인 재교육 프로그램은 내용은 좋지만 너무 짧고 단기적이다. 해당 프로그램에 지원하려면 눈치도 보인다. 각 언론사나 재단에서 선정하는 1년짜리 연수 프로그램도 너무 기간이 짧은 건 마찬가지다. 외국어 교육도 일부 회사에서 학원비나 온라인 수업 수강료를 지원해준다고 해도 미비하다. 익힌 외국어 지식을 매일 활용하는 부서는 국제부 정도에 불과하기도 하다. 그만큼 우리네 언론의 취재 구조가 국내 이슈에 한정돼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기자들끼리 스터디 모임 같은 것도 있는 것 같은데 사실 그리 활성화 되어 있진 않은 것 같다. 뭐 다른 일반 기업들도 비슷하겠다만, 일부 학위 빼고는 언론인들도 뚜렷한 자기개발 수단이 없는 듯 한 느낌이 든다. 그러니 매일 바쁘게 일에 치여 살아가다가도 문득 '내가 뭐 하고 있지' 하는 현타가 오기도 한다.
사실 기자 재교육은 단순히 우리 기자들만의 복지를 채우기 위함은 아니다. 기자들이 꾸준히 스스로 재교육을 해서 좋은 기사를 쓸 능력을 갖추고, 이들이 더 좋은 기사를 써야 전체 사회에도 도움이 된다. 언론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할 경우 사회가 얼마나 갈등을 겪는지 우리는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국내 언론의 재교육 투자는 취약한 상황을 넘어 거의 전무한 수준이다. 언론재단의 조사에 따르면 매년 재교육이 필요하다는 현직 기자의 응답은 95%를 넘나든다. 하지만 한국 언론 사회는 제대로 된 교육이 이뤄질 수 없는 구조다. 그저 계속 해오던 대로 계속 해나가기 때문에 변화의 조짐조차 발견하기 힘들다.
실제로 국내 기자들은 재교육과 무관한 삶을 살고 있다. 수습기자 시절엔 도제식 교육을 받는다. 어떻게 취재해야 기사가 나오는지 하는 교육인데, 당장의 생존을 위한 것이다. 사회부를 떠나 각 부서에 가도 선배의 경험을 암묵적으로 전수받는 수준에 그친다. 정형화 된 업무 방식이 없고, 일종의 암묵지만 습득한 뒤 실전에서 기자 개인이 취재법을 깨우쳐야 한다. 어찌보면 이런 구조는 기자 개개인이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지만 또 거꾸로 생각해보면 체계적인 매뉴얼이 없다는 뜻도 되겠다. 기자 업무의 특수성을 고려한다 쳐도, 이렇게 알음알음으로 전파되는 취재법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풍화될 가능성이 크다. 이제부터라도 취재와 기사 작성 등에 대한 실질적인 매뉴얼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더욱이 이런 기본적인 업무 숙지를 떠나 좀더 전문성을 쌓기 위해 언론사 자체에서 지원을 더 해줘야 하지 않나 싶다. 마른 걸레 짜기로 대표되는 기자들의 지적 공허함을 채워줄 다양한 방안을 고민해야 된다는 것이다. 미래를 위해 뭔가를 더 준비하고 싶고, 제너럴리스트를 넘어 스페셜리스트로서 좀더 깊이있는 기사를 쓰고 싶은 구성원의 욕구를 사측에서도 빠르게 인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경제부 기자로서 몇년간 일을 하다보면 각종 관련 자격증에 도전하는 식의 고민을 하게 된다. 이때 이런 도전을 응원해주고, 이를 통해 그 기자가 쓰는 기사의 질이 더 올라갈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을 전환해야 한다. 닳아 없어지는 것 같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는 동료들을 매번 배웅하면서 나도 비슷한 생각이 점점 들기에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