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포착 저널리즘의 미래

by hardy
다운로드.jpeg


국회 본회의장을 비추는 사진은 늘 조용하다. 말의 각축장인 그 곳은 항상 시끄러웠지만 요새는 말이 아닌 화면 하나로 국회가 뒤집어지곤 한다. 2025년 10월 26일 저녁, 서울신문이 공개한 한 장의 사진이 그랬다. 최민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본회의장 자리에서 주고받던 텔레그램 메시지가 기자들의 카메라에 의해 포착된 것이다. 자신의 딸 결혼식과 관련한 축의금 관련 내용이 화면에 담겼고 이는 곧 이해충돌 의혹과 청탁 정황 논란으로 확전됐다. 발언도 유출된 문건도 아닌 휴대전화 화면 한 장이 정국의 공기를 흔든 셈이었다.


한국 정치의 지난 몇 년은 휴대전화 화면이 정국을 흔들었던 장면들로 기록돼 있다. 공적 공간인 국회에서 공인이 주고받은 메시지가 포착될 때 그 화면은 곧바로 국민의 질문이 된다. 문자 하나, 말풍선 하나, 단어 하나가 국회 밖으로 확산되며 권력의 민낯을 드러내고, 정당의 논리를 바꾸고, 정치적 책임을 소환한다.


201372446_500.jpg 김유근 청와대 국가안보실 1차장 문자 내용


2019년 YTN과 SBS는 국회 회의장에서 포착된 김유근 청와대 국가안보실 1차장의 문자 내용을 보도했다. 북한 관련 보고와 지시로 해석될 수 있는 대화가 화면에 담겨 있었고, 그 장면은 하루 만에 외교·안보 라인을 둘러싼 거센 공방으로 번졌다. 국회 공간 안에서 오간 문자가 국가 정책 논의의 핵심 키워드로 떠오른 것이다. 화면이 포착되지 않았다면 아예 문제 제기조차 되지 않았을 사안이었기에 화면은 단순한 사생활이 아닌 공적 의혹의 출발점이 됐다.


2022년에는 권성동 의원의 휴대전화 화면이 한국경제와 조선일보 등의 카메라에 잡히며 이른바 ‘체리 따봉’ 사건으로 남았다. 대통령 메시지가 휴대전화 화면에 그대로 노출됐고 이는 단숨에 대통령실과 여당의 관계, 권력의 위계, 당 운영의 투명성을 둘러싼 폭발적 논쟁을 불러왔다. 발언이 아니라 말풍선이 권력을 움직인 상징적 사례로 기록됐다. 한국 정치에서 ‘휴대전화 화면’이 갖는 상징성은 이때부터 훨씬 더 커졌다.


b2cd0b6e-b8c2-409b-81c3-e89a4ab72dfc.jpg


2025년 여름에는 더팩트가 보도한 이춘석 의원 문자 포착 장면이 주식 차명거래 의혹과 연결되며 국민적 공분이 일었다. 이 장면 역시 국회 본회의장과 상임위 공간에서 포착된 것이었고, 그 장면이 아니었다면 ‘의혹’이라는 단어가 언론과 정치권, 그리고 시민들 입에 오르내리는 일조차 없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휴대전화 화면이 이슈를 만든 것이 아니라, 화면이 문제의 실마리를 국민에게 허락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2025년 가을. 최민희 의원 건이 이어졌다. 이 일련의 장면을 보며 공통된 결론 하나에 닿게 된다. 이 화면들은 사생활이 아니라 공공적 질문의 단서였다는 것.


언론이 휴대전화를 의도적으로 열어본 것도 아니고, 해킹으로 취득한 것도 아니며, 국회라는 공적 공간에서 공인이 스스로 열람 중인 텍스트가 카메라의 시선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결국 이 장면들은 한국 정치가 ‘비공개 조율 → 공개 발언’의 구조를 갖고 있는 현실 속에서 비공개 조율의 흔적이 우연히 노출된 사례들이다. 그러므로 휴대전화 화면은 단순히 사생활을 들여다본 창이 아니라 정책 결정 과정의 안쪽을 비추는 의외의 창으로 기능한다.




28400_70162_311.jpg


국회 본회의장과 상임위 회의장에서는 사진기자들이 방청석·프레스석에서 망원렌즈로 의원들의 손과 휴대전화 화면을 ‘줌’으로 당겨 촬영한다. 보통 100–400mm급 망원으로 멀리서 프레임을 잡은 뒤, 촬영 후 크롭(일부 확대)으로 가독성을 높이는 식이다. 한 국회 사진기자한테 물어보니, 의원들이 회의 중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면 앵글을 고정한다고 한다. 사진기자들 사이에서도 이런 방식이 널리 퍼져있고, 은근한 경쟁으로 작용하는 모양이다.


반작용으로 여야 내부에서 ‘휴대전화 보호 필름(프라이버시 필름) 붙이기’ 권고가 공식화되기도 했다. 2023년 국민의힘 원내지도부는 연쇄적인 화면 노출 논란 이후 의원들에게 “보안필름을 부착하고 회의장 내 휴대전화 사용을 자제해 달라”고 공지했다. 보안필름이 측면 시야를 차단해 화면 노출을 줄인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SSC_20230406000759_O2.jpg


이런 방식의 취재를 뜻하는 정확한 언론학적 용어는 없다. 그냥 내스스로 포착 저널리즘이라는 이름을 붙여보고 싶다. 권력이 스스로 드러내지 않는 장면을 있는 그대로 잡아내는 기록 행위라는 의미를 담아서 말이다.


국회 본회의장·상임위처럼 국민을 대표해 정책을 논의하는 공식 공간에서는 의원의 표정·몸짓·시선·휴대전화 화면까지도 공적 영역의 행동으로 간주된다. 사진기자들은 줌 렌즈를 활용해 멀리서 세밀한 장면을 포착하고, 이를 통해 말하지 않은 권력의 속마음, 태도, 무책임, 또는 진중함을 드러낸다.


권성동 의원의 ‘체리따봉’, 최민희 의원의 경조사 메시지, 과거 상임위 도중 게임이나 쇼핑 화면이 찍힌 사례들이 모두 정치적 파장을 일으킨 이유는 이 장면들이 ‘의원 스스로 숨기고 싶었던 진짜 행동’을 국민에게 낱낱이 보여줬기 때문이다. 포착 저널리즘은 바로 그 지점에서 힘을 갖는다. 말보다 행동이, 보도자료보다 현장이, 발언보다 화면 하나가 더 많은 진실을 드러낸다는 믿음 위에서 작동하는 방식이다.




2024112501039910018001_b.jpg


물론 여전히 불편함은 남는다. 휴대전화라는 기기가 가진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속성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 사례를 곱씹으면 포착된 텍스트는 사적 감정이나 사적인 일상을 넘어서 국가 정책, 권력 관계, 윤리 의무, 이해충돌 등 공익 영역의 문제와 맞닿아 있었음을 부정하긴 어렵다. 휴대전화 화면이 뉴스가 된 것이 아니라 공적 질문이 화면을 통해 떠오른 것이다. 결국 우리가 그 장면들을 보는 이유는 궁금증이 아니라 감시였고 목적은 사적인 폭로가 아니라 공적인 검증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쯤에서 한 번 멈추고 많은 시민들이 제기해 온 반론을 정직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래도 휴대전화는 사적이지 않느냐는 문제의식이다. 어떤 이는 말한다. 본회의장이라도 휴대전화만큼은 사적인 영역이라 보호받아야 하고, 언론이 그 화면을 찍고 확대해 문제를 만드는 것은 ‘과잉 저널리즘’이라고. 불편함을 느끼는 감정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휴대전화는 메시지뿐 아니라 가족 사진, 금융 정보, 건강 정보, 인간관계까지 내포하고 있는 기기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휴대전화 속을 훔쳐보는 행위는 본능적으로 ‘도청’이나 ‘사생활 침해’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분리해서 보아야 할 지점이 있다. 사적 기기를 훔쳐본 것이냐, 공적 공간에서 스스로 노출된 장면을 기록한 것이냐라는 구분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그것은 명백히 사생활 침해이고 언론 윤리 위반이며 위법 소지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사례들은 후자에 가깝다. 국회의사당이라는 100% 공적 공간, 그것도 국가의 일을 처리하는 순간에 공인이 스스로 열람 중인 메시지가 언론의 취재 동선과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무단 침입’이 아니라 ‘공개 공간에서의 시야 포착’이라는 점에서 휴대전화 화면은 더 이상 100% 사적이라 보기 어렵다.


여기서 중요한 키워드는 공인성과 공적 공간성, 그리고 공무 관련성이다. 헌법학과 언론윤리 분야는 일관되게 말한다. 공인의 사생활이 절대적으로 보호되는 영역이 존재하지만 공적 활동 중 생산된 텍스트는 ‘완전한 사적 정보’로 보기 어렵다고.


특히 권력 행사와 이해충돌 가능성, 이익 공유, 로비, 정책 지시와 연결될 수 있는 메시지는 국민의 알 권리와 직접 충돌하기 때문에 윤리적 해석이 달라진다. 결국 사생활이라는 개념조차 맥락 속에서 다시 판단해야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해외에서도 이러한 카메라 포착 사례는 비슷한 구조로 논쟁을 겪어왔다. 2016년 영국에서는 다우닝가에서 한 고위 보좌관이 들고 있던 브렉시트 관련 문서 일부가 장초점 카메라에 찍히며 논란이 일었고, The Guardian과 Reuters는 그 화면을 통해 정부 전략의 방향을 추적했다. 그 장면 역시 사생활 침해가 아니라 공적 결정 과정의 단서를 포착한 것으로 해석됐고 결국 영국 정부가 공식 브리핑에서 해명하는 과정까지 이어졌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휴대전화 화면 포착 보도는 ‘저널리즘의 일탈’이 아니라 ‘저널리즘의 필요 영역’에 가깝다. 민주주의는 권력을 투명하게 감시하는 시선을 통해 작동하고, 언론은 그 시선의 가장 바깥 경계에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우리가 본회의장 난간에 카메라가 있는 풍경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유도, 사실은 같은 철학 위에 있다. 단지 텍스트의 형식이 연설문이 아니라 메시지였을 뿐, 그 본질은 공적 감시다.


다만, 이것이 언론이 마음대로 찍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감시의 역할이 정당하려면 그 감시 방식은 국민의 신뢰를 잃지 않는 윤리적 기준 위에서 움직여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의 화면 포착 보도는 공익적 문제 제기에는 성공했지만 보도 관행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윤리적 가이드라인으로 발전시키는 데는 다소 미흡했다.


그래서 이제는 언론이 스스로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공적인 감시를 하되, 사적인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공익의 가능성이 명백할 때만 찍고, 맥락을 충분히 확인한 뒤 보도하며, 사적 피해는 비식별로 최소화할 것. 이 세 문장만 지켜진다면, 언론은 감시의 칼이 아니라 감시의 눈으로 남을 수 있다고 본다.




l_2013070601000532900063492.jpg


언론의 감시는 정당하지만, 그 정당성이 오래 지속되기 위해서는 기술이 아니라 태도를 업데이트해야 한다. 나는 화면 포착 보도가 앞으로도 한국 정치 취재에서 불가피하게 반복될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언론은 이 관행을 ‘습관’으로 두지 말고 ‘원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감시의 정당성을 스스로 증명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구체적인 개선 방향은 어렵지 않다. 오히려 이미 상식에 가까운 수준에서 정리할 수 있다.


우선, 명확한 공익 기준이 필요하다. 단순한 호기심 충족, 망신 주기, 사적 감정 노출에 가까운 내용은 어떤 이유에서도 보도하지 않아야 한다. 화면을 찍었다는 이유만으로 기사가 되어선 안 된다. 오히려 “이건 공익적인가”라는 질문에 먼저 답할 수 있는 내부 심사가 선행돼야 한다.


다음으로 맥락 검증 절차를 반드시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 화면은 언제나 ‘단편’이다. 단편을 전체인 것처럼 보도하면 사안은 왜곡되고 보도는 오보가 될 위험을 안는다. 때문에 최소한 당사자 확인과 추가 자료 확보, 반론 요청이라는 기본 절차는 화면 포착 보도에서 더욱 엄격해야 한다.


또한 비식별 조치 원칙을 제도화해야 한다. 제3자의 전화번호, 가족 이름, 계좌, 주소, 민감 정보는 보도와 무관한 영역이다. 화면을 보도하더라도 텍스트의 공적 의미만 남기고 사적 정보는 과감히 덜어낼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촬영 방식과 보정 방식에 대한 투명성도 필요하다. 장초점 촬영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면 최소한 보도 과정에서 원본 취득 경위나 보정 여부 정도는 내부 기록으로 남겨 윤리적 책임성을 확보해야 한다. 이 원칙들은 어렵지 않지만 실행에 옮기는 순간 언론의 신뢰도는 한 단계 올라설 것이다.




c9b35806-612a-4ac9-8585-6ae0e92be0fc.jpg


휴대전화 화면 하나가 왜 이렇게 되는가. 권력자의 사적 순간은 때때로 공적인 결정의 가장 솔직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말로는 숨길 수 있는 것을 화면은 숨기지 못한다. 정치가 말을 통해 자신을 포장할 때, 화면은 그 포장의 안쪽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화면 포착 보도는 정치를 더 투명하게 만들고, 국민이 권력의 움직임을 더 빨리 감지하도록 돕는다. 이것이 휴대전화 화면이 언론의 피사체가 되는 이유다.


그렇다고 해서 언론이 무례해져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감시는 예의와 공존할 수 있고, 공익과 사생활 보호 역시 충돌만이 답은 아니다. 언론이 단 한 번의 보도라 하더라도, 그것이 한 사람의 명예와 한 정책의 신뢰를 동시에 건드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화면 포착 보도는 충분히 공정하고 책임 있는 방식으로 발전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감시의 필요성을 증명해왔다. 이제 필요한 것은 감시의 방식이 성숙해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다.


국회를 내려다보는 카메라는 앞으로도 본회의장의 숨결을 기록할 것이다. 어떤 날은 발언을 통해 진실이 드러나고, 또 어떤 날은 한 줄의 메시지가 권력의 의도를 대신 말할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같은 질문 하나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장면은,공익을 위해 필요한 기록인가. 언론이 이 질문을 끝까지 붙잡는다면, 화면 포착 저널리즘은 결코 저열한 호기심의 장르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민주주의의 투명성을 떠받치는 한 축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엠바고 대혼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