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추웠던 그 겨울을 잘 잊지 못한다. 나는 당시 국회 출입이었는데, 거물급 대선 후보와 관련한 의혹을 취재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모든 언론사들이 달려들어 단독 경쟁이 쏟아졌다. 지나고 보니 그중에 절반은 다 오보였지만.. 매일매일 전쟁처럼 살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신문을 보거나 인터넷을 켜기 싫은 괴로운 나날이었다. 그리고 제보 하나하나가 절실했다.
그러다 한 취재원을 알게 됐다. 어떤 악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후보 관련 의혹을 여러 차례 제기한 인물. 2022년 2월 8일 화요일 오전 9시 15분. 나는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국민일보 박세환 기자입니다. A 변호사님께서 번호를 알려주셔서 실례를 무릅쓰고 문자 올렸습니다. 잠시 통화 가능하실지요.' 답은 오지 않았다.
나는 그의 사무실이 있다던 여의도의 한 빌딩 앞으로 찾아갔다. 오후 2시 45분. 다시 문자를 보냈다. '선생님 자꾸 죄송합니다. 인사나 드리고 싶어서 빌딩 앞에 와있는데 인사나 드릴 수 있을까요.' 역시 답이 없었다. 대신 그는 그날 자신의 유튜브 방송을 통해 의혹 여러 개를 풀었다. 근데 솔직히 다 고만고만한 것들이었다.
어찌어찌 연락이 닿았다. 그런데 느낌이 싸했다. 취재를 거쳐 나간 본보의 기사를 지적하거나 다른 방송사와 비교하는 식으로 얘기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사람은 주로 방송사와만 거래하고 있었다. 애초에 내겐 기사거리를 줄 생각이 없었다.
근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던 나는 그저 잘 보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유튜브 잘 봤다고 보내고, 기사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도 성심성의껏 들어주고. 그러나 그가 제공한 기사들은 주로 종편을 통해 보도됐고, 내게는 그 보도를 보라고 할 뿐이었다.
그러면서 또 한 번 훈계. 기자들이 어떻고, 언론이 이래서 문제라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맞장구치고 하면서 나는 모멸감을 느꼈다. 내가 이 짓을 도대체 왜 하고 있지? 이 사람한테 한 마디 듣는게 뭐 그렇게 중요하다고.
도대체 누가 기자를 두고 갑이라고 하나. 정보를 갖고 있는 취재원에게 기자는 항상 을이다. 갑질하는 기자는 배부른 곳에서 편하게 살고 있는 거다. 매번 을이라고 느끼는 기자들이 훨씬 많고, 그게 정상이다.
쏟아지는 단독 속에 부담을 느끼고, 경쟁에서 이기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다. 남들이 쓰지 않는 기사를 쓰고 싶다는 욕망이 커진다. 그러면 정보를 갖고 있는 취재원에게 최대한 어필하게 된다. 저한테만 중요한 정보를 달라고 구애한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까지다. 서로 간에 예의와 신뢰가 전재됐을 때 취재도 가능하다. 근데 그때는 그걸 잘 몰랐다.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듣기 위해 무례를 참았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럴 필요도 없었다.
물먹으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차피 하루살이고, 최대한 노력해 보고 안되면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시키는 선배 기자가 와도 못하는 것들이 수두룩하다. 왜 나는 그때 단독기사를 못쓰거나 하면 나 자신이 무능력하고 쓸모없다고 생각했을까. 그냥 하는 데까지 해보면 되는 거였다.
그 취재원은 아직도 활동하고 있다. 어차피 얽힐 일은 앞으로 없을 것이지만, 난 그를 보며 배우는 게 있었다. 내가 가진 정보나 무기들은 어차피 유한하고 제한적이다. 모든 인간이 전략적으로 선택하고, 이득이 되는 사람이나 조직, 집단에 좀 더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자고 다짐한다.
기자 생활 가운데 가장 큰 모멸감을 느꼈던 그때 이후로 난 노력 하되, 내 마음을 다칠 정도까지 상대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무례한 취재원에게 굳이 친절하려고 하지 않는다. 모멸감을 꾹꾹 눌러 담고 감내하면서 제대로 된 기사를 쓸 수 있을까?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신 그 취재원에게 한 번쯤은 한방 날리고 싶다는 일념이 불타오른다. 항상 나를 지탱해 줬던 건 그런 마음이었다. 얼른 내 역량과 명성을 키워서 나를 무시하던 취재원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그런 마음. 그게 훨씬 더 생산적이었다.
그러니 혹시나 이 글을 보는 언론고시생 혹은 기자분들. 취재 도중에 당한 불합리한 워딩이나 처사를 참지 않았으면 좋겠다. 불나방처럼 잠시 피었다 꺼질 권력이나 정보를 갖고 있다고 거들먹거리는 취재원에게 굳이 굽신거릴 필요가 없다.
선배나 팀장, 부장이나 국장이 책망하고 잠시 괴로울 순 있겠지만, 예의와 신뢰가 없는 관계에서 제대로 된 기사가 나올 리 만무하다.
대신 마음을 단단히 먹고, 내가 누군가의 갑을 관계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도록 나날이 나를 가꾸어 가겠다는 생각으로 정진했으면 좋겠다. 그 짧은 설움의 기억이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