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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식이형, 현지누나'와 민주당

by har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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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김남국 대통령실 비서관(전 민주당 의원)의원과 문진석 의원의 문자 사건이 벌어졌죠? 문 의원이 김 비서관에게 문자로 인사청탁을 했습니다. 모교인 중앙대 후배를 자동차산업협회 회장으로 추천해 달라는 거였습니다. 연봉이 3억원에 달하는 좋은 자리였습니다.


문 의원은 김 비서관을 '아우'라 칭하면서 추천을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김 비서관은 '제가 훈식이형과 현지누나에게 추천할게요'라고 답했습니다. 이런 긴밀하고 은밀한 대화는 한 언론사의 카메라에 포착됐고, 파문이 불거졌습니다. 결국 김 비서관은 사표를 내고 대통령실을 그만두게 됐습니다.


이번 사건은 민주당 내부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온 ‘형·누나 문화’를 공론장에 다시 올려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단순한 호칭 문제가 아니라, 한국 정치의 방식이 어떻게 형성돼 왔는지를 들여다보게 하는 문제라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특히 운동권 출신들이 정치의 주류가 되면서, 그들이 젊은 시절 체득한 공동체 문화가 지금도 그대로 정치적 의사결정의 배경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곧 문제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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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민주당 정권인 문재인정부 청와대를 출입기자를 4년 가까이 했습니다. 이어 국회에선 민주당을 1년 가량 맡았고요, 곧바로 국민의힘에도 1년 조금 넘게 부반장으로 있었습니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을 모두 거친 겁니다.


국회를 오래한 선후배님들이 보기엔 조금 우습겠지만, 그래도 저는 이 두 정당이 너무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정치적 선호를 떠나서 서로간의 구성원을 대하는 방식, 또 기자를 바라보는 시선 등이 완전 판이합니다.


이번 논란이 보여줬듯 민주당은 모두가 형 동생 입니다. 문재인정부 때도 느낀건데, 공직에 있거나 3선 이상의 국회의원인데도 다른 의원이나 높은 분을 호칭할때 형 아니면 누나 였습니다. 밑의 사람을 부를 때도 그냥 이름이거나 그 새끼, 저 새끼였습니다. 친하긴 진짜 친해 보였습니다.


기자를 대할때도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일단 민주당은 기자를 싫어합니다. 언론이 자기편이 아니라는, 근거없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들은 기자도 오래 두고 보는데요. 어느 정도의 세월과 통과의례를 거쳐 우리 편이라는 생각이 드는 기자에겐 정말 잘해줍니다. 취재원과 기자가 아니고 거기도 형 동생 합니다. 이 벽을 넘지 못하면 거리를 두고, 소통을 잘 하지 않으려 합니다.


반면 국민의힘은 처음 출입하면 좀 데면데면 합니다. 아무리 친해져도 반말을 잘 안하고요. 사무적인 태도가 주를 이룹니다. 비즈니스 관계라는 느낌이 강한데요. 기자를 대할 때도 비슷합니다. 예의가 바르지만 어딘가 모르게 차가운 느낌? 하지만 대놓고 언론을 배척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편이 아니더라도, 전화는 매번 받아주는 그런 이미지?


물론 이건 제가 7년 넘게 정치부를 하면서 느낀 부분이고요. 케이스 바이 케이스겠습니다만 아무튼 민주당의 그 호형호제 분위기는 저로서는 적응하기 힘들었습니다. 물론 좋은 사람과 취재원이 많았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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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1980년대의 학생운동을 떠올려보면 왜 민주당에서 ‘형·누나’ 호칭이 중요한 상징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운동권 내부에서는 위계가 곧 생존과도 맞닿아 있었습니다. 선배가 먼저 징집되거나 검거될 때 후배들에게 도피 경로와 연락망을 넘겨주는 구조에서 ‘형’이라는 말은 단순한 친근함이 아니라 책임과 보호의 약속이었습니다.


이른바 ‘서클 문화’라고 불리던 학생운동 조직에서는 ‘선배가 하자면 하는 것’이 거의 불문율처럼 자리 잡았습니다. 1980년 광주의 기억을 공유하거나 구속과 고문을 경험한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유일한 정보망이자 안전망으로 존재하면서, 호칭은 신뢰의 기호가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누나’라는 호칭도 남성 중심 운동권에서 소수였던 여성운동가들에게 일종의 보호막처럼 사용되었습니다. 동지적 관계 속 ‘누나’는 동시에 ‘현장의 경험자’와 ‘전략의 조언자’라는 의미를 함께 갖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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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화는 단지 위계만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운동권 대학가에서는 회의가 끝난 뒤 삼삼오오 모여 한 잔 기울이며 토론을 이어가는 관행이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이름 대신 ‘형’, ‘누나’, ‘동지’ 등 호칭이 쓰였습니다.


술자리에서 형이 던진 한마디가 다음날 시위 동선이나 대자보 방향을 좌우하는 일이 흔했습니다. 당시 운동권 출신들에게 ‘형이 얘기했으니까 믿는 것’은 정치적 판단 이전에 인간적 신뢰의 문제였습니다.


이 문화는 이후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계열 정당들이 만들어질 때도 고스란히 이어졌습니다. 국회 안에서 특정 파벌이 형·동생 관계망을 중심으로 뭉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른바 386세대가 정계 진출할 때 함께 정치권으로 끌어올린 후배 그룹 역시 선후배 문화 안에서 자리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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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사례도 곳곳에 존재합니다. 어떤 의원은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건 형이 정리해줄게”라는 표현을 자연스럽게 쓰곤 했습니다. 선거 전략을 논의하는 비공식 회의에서는 “형님이 이렇게 하자고 했어”라는 말 한마디로 논쟁이 단번에 정리되기도 합니다.


2000년대 초반 국회 회의록 외부에서 오간 문자메시지를 보면 “형이랑 이야기했어?”, “누나가 오케이 했대” 같은 문장이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


더 흥미로운 점은 이 문화가 나이를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라 ‘경력의 두께’를 기준으로 한다는 점입니다.


50대 초반 의원이 더 나이가 많은 60대 의원에게 형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40대 후반 의원이 50대 의원에게 형이라 부르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운동권 조직 내에서 누가 더 오래, 더 깊이 현장에 있었느냐가 관계의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화는 제도적 절차보다 인간적 유대를 통해 결정을 빠르게 미는 데에는 유리하지만, 그만큼 사적 관계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아지는 문제를 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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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에서는 이런 관계망이 종종 ‘핵심 라인’이나 ‘문고리 권력’ 형태로 나타납니다.


공식 회의에서 논의되기 전에 이미 ‘형들끼리’ 단톡방에서 방향이 정해지고, 회의는 그 결론을 통과시키는 절차적 단계에 불과해지는 일이 많습니다.


일부 보좌관들은 실제로 “의원님들끼리 이미 정리하고 내려오셨어요”라고 말하곤 합니다. 결론이 내려지는 장소가 회의실이 아니라 사적 관계의 네트워크라는 뜻입니다.


이런 방식은 배제의 구조를 강화합니다. 운동권 출신이 아닌 의원은 자연스럽게 ‘형문화’의 문 밖에 서게 되고, 정책 논의나 의견 개진에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같은 당 내부에서도 정책전문가나 젊은 초선들은 “형 아니면 말을 못 꺼낸다”는 하소연을 종종 합니다.


형문화의 폐해는 정치적 사건에서도 드러납니다. 특정 의원이 논란에 휩싸였을 때 “형이 좀 도와줘라”라는 말 한마디로 방어 논리가 짜였다는 일화는 정치권 주변에서 이미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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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적절한 행동이 적발되어도 공식적인 윤리 절차 대신 형·동생 사이의 합의로 ‘조용히 덮고 지나가는’ 문화가 존재한다는 점은 수년간 여러 취재를 통해 반복적으로 지적돼 왔습니다.


심지어 지역구 공천 과정에서도 “형이 추천하는 사람이야”라는 말 한마디가 경선 결과보다 더 큰 힘을 갖는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가 당 내부에서는 공공연하게 돌곤 합니다. 국민에게 공개되어야 할 공천의 기준이 형들의 대화에서 결정되는 구조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와 충돌합니다.


이 문화는 세대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MZ세대 정치참여자들은 ‘형문화’를 일종의 폐쇄적 카르텔로 인식합니다. 능력과 경쟁보다는 ‘운동권 족보’가 더 중요해 보이고, 의견을 내기보다 기존 관계망에 맞추는 것이 생존전략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국민 시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적 책임보다 사적 관계가 더 강하게 작동하는 정치문화는 신뢰를 떨어뜨립니다. 국민은 왜 국민에게 설명해야 할 일을 형끼리 해결하려 하느냐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이번 김남국·문진석 문자 논란이 커진 것도 ‘형문화’라는 사적 관계가 공적 대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이 증폭됐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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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형문화가 모두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정치인 개인 입장에서 보면 오랜 신뢰관계는 위기 상황에서 서로를 보호하는 안전장치이기도 합니다. 운동권 출신들이 탄압의 경험을 공유하며 쌓은 끈끈함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문화가 시대와 제도를 넘어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민주주의는 투명성과 공개성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형문화는 이 가치와 종종 충돌합니다. 그것이 과거에는 생존 전략이었다면, 오늘의 정치에서는 오히려 견제와 균형을 흐리는 장식물이 되었습니다.


결국 운동권의 형·누나 문화는 민주화의 격렬한 현장에서 탄생한 정서적 유대였지만, 오늘날 정당 운영 방식 속에서 폐쇄성과 비공식성을 강화하는 장치로 남아 있습니다.


사적 관계가 공적 판단을 덮어버리는 순간, 정치의 책임성과 국민의 신뢰는 무너집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형과 누나가 아니라, 더 많은 절차와 설명, 그리고 더 많은 공개성입니다. 형의 말보다 원칙이 우선되는 정치가 자리 잡을 때, 민주주의는 비로소 한 단계 더 성숙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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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번 사건으로 민주당이 바뀔까요? 아니요.


그렇게 평생 살았고, 그런 사람들이 요직과 중책을 맡고 있으니 꿈적도 안할 겁니다.


그냥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려야지요. 대한민국은 민주화 세력에게 빚을 졌지만, 이제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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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들도 이젠 적폐가 될 수 있습니다. 견제가 없는 독재 정권이 몰락했듯이, 그들도 과거의 영광에 매달려 삶을 고치지 않는다면 더 젊은 세대에 의해 적폐 혹은 고루한 세력으로 받아들여지고 자연스럽게 역사에서 도태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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